지난 5월 13일 한국니체학회와 우리대학 철학과 대학원이 공동으로 주관한 학술 발표회의 발제문을 일부 발췌 정리한다. <니체와 종교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 발표회에서는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나선 파괴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과 그의 종교 비판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펼쳐졌다. 특히 우리대학 철학과 김정현 교수의 주제발표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니체와 불교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통해 니체 철학과 불교의 상관관계를 조명한 그의 발제문을 일부 발췌 정리한다.  /편집자

니체의 불교 이해
불교가 염세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이라는 고발은 유럽인들이 처음 인도와 접촉을 한 이후 형성되어 온 것으로, 뮐러(Max MUller)에 의해 불교 연구의 원리적 주제가 된 후 오늘날까지 넓게 지속되고 있다. 뮐러는 발리어 불교경전 『아비달마(阿比達磨)Abhidhamma』와 『금강경』에 나오는 열반 개념을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불교 이해 역시 이러한 서양의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지성사적 기초위에 있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불교를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허무주의 운동’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소개했던 허무를 갈망하는 종교로서의 불교이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가 지니고 있는 공(空)사상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예리한 시각으로 간파하고 있었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정신적 힘의 몰락과 퇴행을 나타내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상승된 정신의 힘을 표시하는 ‘적극적 허무주의(der activer Nihilismus)’ 등 이중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며, 불교가 삶을 부정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삶과 현실을 긍정하는 철학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불교가 자아(atman)나 브라만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현상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니체 역시 서양 형이상학의 계보 전체를 해체하며 생성과 변화 속에 있는 현실 자체를 철학적 입지점으로 설정하는 현상주의적 현실긍정의 철학을 전개한다. 이러한 적극적 허무주의 즉, 유럽적 허무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니체는 영원회귀사상으로 제시한다. 그는 허무주의, 가지의 가자치전도, 힘에의 의지, 유럽적 불교의 형식으로서의 영원회귀라는 주요한 이론을 모두 소통시키며 이를 통해 현실과 생명을 관통하는 디오니소스의 철학, 살아있는 몸을 기반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몸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원한감정에서 탄생했다면 불교는 원한이나 복수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불교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이 점이 불교를 그리스도교로부터 철저히 갈라 놓는다―도덕 개념의 자기 기만을 이미 뒤로하고 있다. 내 언어로 말하자면 불교는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불교는 그리스도교처럼 ‘죄’의 개념을 이용하지도, ‘죄와의 싸움’을 선언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고통과의 싸움’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정신섭생의 구체적인 길을 찾는 위생학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복수심이나 원한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불교의 복수에 대한 반대와 유사하다. 니체는 『법구경』의 한 구절인 “적의는 적의에 의해서 끝나지 않는다. 적의는 자비에 의해 끝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를 불교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 삶의 태도와 원한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섭생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수동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능동적 허무주의 속에서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주체 해체와 불교의 무아사상
세계는 생성 변화하며(諸行無常), 생, 노, 병, 사 등 인생의 모든 것은 고통이고(一切皆苦), 따라서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아라는 생각을 없애면(諸法無我) 열반이 온다(涅槃寂靜)는 불교의 교리와 세계는 생성 변화하는 디오니소스의 세계이며, 이 가운데 이성적 개념적인 언어로 포착한 ‘나’라는 개념의 허구를 자각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정신을 추구하는 니체의 사상은 생성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정신적 깨달음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상적으로 공명한다.
니체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실체로서의 대상 그 자체를 부정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건들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데, 이를 우리는 논리적 언어로 동일화시키고 범주화시켜 존재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인식이란 현상들의 관계성에 의해 드러난 허구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해석 체계라는 니체의 사고는 현상세계와 인식의 무상함을 소통적 언어로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반야심경』을 닮아 있다.
자아의 문제에 있어서도 니체는 주체 혹은 자아라는 관념을 먼 태고 적부터 있었던 영혼이라는 통속적 미신의 영향으로 이해한다. 그는 『선악의 저편』 서문에서 독단적 철학의 예로 아시아의 베단타이론과 플라톤주의를 지적하며, 이것들이 설정하는 영혼 개념의 오류를 밝히는 작업이 앞으로 인류의 과제임을 명시한다. “자아의 오류를 발견하자! 이기주의를 오류로 보자! 이타주의를 그 반대로 이해하지 말자! 이것이 소위 말하는 다른 개인들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아니다! ‘나’와 ‘너’를 넘어서자! 우주적으로 느끼자!”
니체가 주객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새롭게 설계하고자 하는 인간학의 구조는 능동적 허무주의적 인간이며 현실 긍정의 인간이다. 그의 현실 긍정적 세계관의 기초는 그의 자아에 대한 철학적 해체 작업과 ‘자기’를 얻는 기나긴 과정을 그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니체 사상과 불교는 무아(無我)의 문제를 통해 비교될 수 있다. 
무아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금강경』에서 ‘금강’과 연관된 산스크리트어 ‘와즈라체디까(Vajracchedika)’에서 ‘와즈라(Vajra)’란 ‘벼락(thunderbolt)’, ‘번개’ 혹은 금강석(Diamond)를 의미하며, 이는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chedika) 금강석 혹은 ‘벼락의 섬광과 함께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잘라버리는 것’을 뜻한다. 『금강경』은 모든 집착과 상을 버리는 것이 ‘지혜의 완성’이자 보디사드와(보살)의 실천적 행위로 보고 있다. 여기서는 자아, 영혼 불생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집착을 갖지 말 것과 모든 객관적 세계의 실체적 현상에 집착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의 훈련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확신하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주체가 벼락을 맞아 새롭게 깨어난 눈으로 세계를 볼 때 가능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실체로서의 모든 존재를 부정하고 생성하는 세계 그 자체를 어떤 집착도 없이 바라보는 자를 일러 ‘보디사뜨와’라고 부른다. 이는 벼락을 통해 집착에 사로잡힌 자신을 깨버리고 정신적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진정한 인간의 구원 가능성이 바로 각 인간의 자기 구원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락을 맞고 지혜의 암사자 속에서 ‘극복인’을 탄생시키는 니체의 사유 역시 불교적 사유를 닮아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인류에 대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번개를 맞고 새로 태어난 인간을 ‘극복인’이라 말한다. 인간이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개를 맞아 파멸하고 몰락해야 새로운 의식차원으로 상승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의 세계허상이 깨질 때 나타나는 진리를 니체는 ‘지혜의 번개’, ‘사나운 지혜’, ‘지혜의 암사자’라고 표현한다. 번개를 맞고 몰락과 상승을 할 때 인간은 극복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체가 문화적 데카당스로서 수동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능동적 허무주의 속에서 새로운 미래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이렇게 다시 태어난 자각된 인간을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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