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창 용(칼럼니스트)

 의심할 것도 없이 김일성은 분단한국의 중요한 정치지도자 중의 한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이 같은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소련 점령당국의 지원에 힘입은 바도 적지 않지만 빨치산 활동이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빨치산 활동은 오늘날 북한 사회의 혁명전통 근원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이유로 빨치산 활동은 북한 당국에 의해 과대 포장되거나 영웅적으로 그리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남한사회는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인색하게 평가하거나 심지어 '가짜 김일성' 논쟁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김일성은 대략 1932년부터 소련으로 도피하는 1941년까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그것도 한인공산당의 독자조직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예하 중국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다. 물론 이전시기 한인 빨치산 부대에 참여했다고는 하나 그 활동성과나 위치가 미미해 크게 평가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직후로 보인다. 당시 코민테른은 '과거 조선공산당이 전적으로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지식인과 학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노동자와의 연대가 부족했고, 파쟁이 심했음'을 비판하면서 노동자 · 농민에게 기초한 조선공산당의 재조직 방침을 정했다. 이 결정으로 만주 조선공산당 지부가 해체됐다. 그리고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자 만주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한인 빨치산 조직들은 대거 합류해 '동북항일연군'으로 공동 항일전선을 펼치게 된다. 김일성 역시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이즈음 본명인 김성주를 숨기고 전설적인 영웅으로 회자되던 '김일성'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꿨다.

 아무튼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로 대표된다.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사무소와 주재소 습격사건이다. 이때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소탕작전으로 만주일대의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 '동북항일연군' 예하 100여 명의 유격대를 이끄는 지휘관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9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인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일본인 순사 5명이 고작인 국경의 작은 마을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마침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은 주재소 소장의 환송연 술판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당연히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과(戰果)래야 순사 어린 자녀 1명과 일본 민간인 1인을 살해한 정도로 미미하기 짝이 없는 전투였다. 그러나 만주일대의 독립군을 평정해 가던 일본으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 순식간에 퍼졌다. 동아일보는 두 차례에 걸쳐 호외를 발행하고 1주일을 넘게 연일 상세하게 승전소식을 전했다. 이 보도로 김일성은 전설적인 영웅으로 다시 한번 조선민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의기소침해 있던 독립군 진영과 조선 민중에게는 활기를 불어 넣어 항일전선을 재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만주 항일운동에 있어 파탄 직전에 내몰린 조·중 항일공동전선의 부활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 토벌작전은 강화됐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투항했다. 더러는 일본군 앞잡이가 되어 동료소탕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도 김일성은 투쟁을 계속하다가 패배가 확실해지자 소련으로 도피했다.

 해방직후 평양군중 앞에 나타난 김일성은 34살의 앳된 청년에 불과했다. 군중들이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며 동서로 번쩍이며 일본군을 물리치던 전설의 김일성장군을 그리고 있을 때다. 그러나 애시 당초 백마를 타고 흰 수염을 날리며 축지법을 쓰는 그런 김일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가짜 김일성'논쟁도 있었지만 보천보전투를 이끈 지도자가 북한의 김일성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 같은 항일업적에도 불구하고 소련제국주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정권을 수립한 것이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 그리고 오늘의 북한 인민들을 궁핍으로 내몬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일성에 대한 공(功)과 과(過), 그리고 사실보다 과장된 업적들을 엄격히 규명하는 일이 통일한국을 대비한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이다.

조 창 용(칼럼니스트/한국독립운동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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