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육원 사회봉사팀의 이번 일정은 네팔의 카투만두 외곽에 위치한 달마스탈리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한의대 봉사팀과 치대 봉사팀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한글문화교육 봉사팀 모두 합하면 서른이 훨씬 넘었다. 의료봉사단의 활동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이국의 풍물을 관람하는 수준의 여행을 생각했다. 물론, 그런 환상이 깨지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천의 자연을 가진 네팔의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과 아름답게 솟아오른 산들을 묘사할 수 없는 것 또한 이번 봉사팀의 헌신에 대한 작은 경의의 표시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일 수도 있다. 물론 문화교육팀의 일원인 나로서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자화자찬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현지의 기후와 낯선 사람들과 낯선 음식에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버린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수없이 봉사팀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히말라야 중턱쯤에서 포기하고 교당으로 돌아간 것이 세 번이다. 히말라야는 듣던 것처럼 매우 높았다. 그리고 지금에야 생각난 것인데, 히말라야 쪽은 한국으로 오는 길이 아니었다. 정말 바보같이)

 봉사활동의 일정은 정확히 지난달 2일부터 10일까지였고, (모든 일정은 9일 이었으나 시차 관계로 현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6박 7일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봉사활동은 이동시간을 제한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이루어 졌다. 처음 일정표를 받아 봤을 때는 배보다 배꼽이 큰 봉사활동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3일간의 강행군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었다.

 현지의 환자들 대부분이 앓고 있는 병은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열악한 의료 환경과 의료정보 부제가 이들의 병을 더더욱 부추긴다고 한다. 한의대 한경훈 선생(그는 한방봉사팀 지도 한의사이다)는 너무나 많은 환자들이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지만 현지의 여러 사정들이 안타깝기만 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정밀 진단기구도 없거니와 한정된 약제와 한정된 시간이 봉사팀을 더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듯 했다.

 치과의료봉사 역시 한의대와 사정은 비슷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고, 치과질환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관심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진료는 썩고 상한 이를 뽑아주거나 스케일링을 위주로 해서 진행되었다. 역시 한정된 장비와 물품이 그들을 압박하고, 치과질료를 낯설어 하는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문제가 그들을 더더욱 어렵게 하는 듯 했다. 봉사활동 중 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치대 박상규 선생의 말에 의하면 현지의 환자들은 정말 아파서 온 환자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분의 충치환자가 그렇듯 발치 후 상당한 통증이 있었을 텐데 다음날 찾아오는 환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말로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 정도 통증은 무시하고 일터로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박상규 선생은 자신이 이를 아프지 않게 뽑아 환자들이 일터로 향했을 것이라는 농담을 던졌지만, 내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치과는 어떻든 이틀을 연속으로 가기가 힘 듯 곳이라는 것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아프지 않게 뽑았다니)

 한글문화교육 봉사 역시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었다. 어느 정도 한국어를 구사하는 현지 가이드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주가 되었지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정말로 한정되어 있었다. 영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를 며 칠 내에 익힐 수 있는 프로그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14세기 후반 플로랑드의 한 소년이 신의 계시를 받고 라틴어를 자유자제로 구사한 것이 가장 빠른 속도로 언어를 습득한 일화인 동시에 가장 최근 일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도 거짓말 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글문화봉사팀이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현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이드들이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게 되면 상당히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도 하고, 취업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 현지 이화정 교무님의 말 때문이었다.

 

함께 놀다 배워버린 그들의 말과 노래


 현지 사정을 꼼꼼히 체크하지 않은 관계로 우리의 한국어 교육에는 상당히 많은 난관이 있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하다 결국 그들과 놀아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과 정말, 아주, 매우 열심히 놀아 버렸다. 삼일 동안 '가나다라'를 한다고 뭐가 달라 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 어머니, 토끼, 자동차를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은 우리의 말을 배웠으며, 급기야 참가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노래와 그들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한글문화봉사팀의 '묻지마 한글교육 프로그램'은 언어와 언어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준비되지 못한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변명이라고 치부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그들은 언젠가 '알지 못하는 나라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쓰고 이런 노래를 불렀지, '한국' 하면 그들의 착하고 맑은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만은 한글봉사팀 모두가 자신하고 있는 부분인 듯싶다. (어쩌면 우리는 언어교육의 정수를 체험하고 왔는지도 모른다. 잉글리쉬가 마음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한글봉사팀 만이 아닌 이번 사회봉사팀 일원 하나 하나가 네팔인에게 자신들의 얼굴을 각인 시키고 왔으리라 확신한다. 한방의료팀에서는 약 700명의 네팔사람들에게, 치과의료팀에서는 약 300명의 네팔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자신의 안쓰러운 표정과 맑은 웃음을 마음껏 선보였으리라 생각된다. 1000명이 넘는 먼 나라의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봉사팀 모두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 헌신하고, 그 결과를 기다렸던 그 며칠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서 덕 민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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