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을 막바지에 두고 계절을 달리하는 찬비가 내렸다. 잠깐 우산 없이 밖을 나다녔는데 빗방울에서 서슬이 느껴졌다. 몸이 약해진 것이라기보다 마음이 여려진 것인가 보다.

 가방에 담긴 책과 노트가 후줄근히 젖었다. 비가 한종일 내려선지 기분 역시 침울해졌다. 소주 한 잔과 부침개가 생각났다.

 미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이 잠시 반짝하는 유행가에서나 허다할까?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대중 심리나 감정에의 호소가 그나마 나을 것이다. 진위의 분별이 서질 않고 광기가 아닌 엽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작자는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라는 부제를 통해 당대의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그 시대의 주변과 경계의 인물들의 행적을 뒤좇는다.

 독학으로 고유 학문의 경지에 올랐으나 주위의 냉대와 멸시 속에서 굶어 죽은 천재 김영, 평생을 두고 둔재와 무식한 노력으로 1만 번 이하로 읽은 책은 꼽지도 않은 1억1만3천 번의 독서광 김득신. 도끼로 제 머리를 깨고 송곳으로 귀를 찌른 서문장과 같은 서얼 출신으로 능력대로 인정받는 세상을 바랐던 박제가.

 무언가에 미친 벽이 마침내 광기의 전과 결합하여 자신의 생에 주인이 되는 옛사람들의 내면으로 찬비에 젖은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만 했다. 

 몇 번에 걸친 만남과 헤어짐 이후로도 역시 그 이전의 삶과 자신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만남은 맛남으로써 맛난 만남이다. 음란하지도 난잡하지도 않아 오래 사귀었으나 몸을 나누지는 않은 기생 계랑과 허균의 전송을 나온 듯한 우정, 마음에 맞는 벗들과의 자리에 흰 옷 입은 선비들이 제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며 연주를 하던 홍대용과 그 벗들.

 서로를 그려 헤어짐을 우려치 않고 만남의 맛남과 삶을 바꾼 만남은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든다.

 일상 속의 깨달음을 간파하는 자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사물과 대상의 핵심을 찌르고 본질을 투지하는 맑고 깊은 심안. 자신의 마음에서 출발해 자아와 타자와 삶 속에서 곧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 그 자체로 삶이었다. 스스로를 자신과 시대에 비춘 예술가들의 삶과 꿈은 숨 가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경유하는 우리들에게 오래된 미래를 찾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천 명 구 (인문학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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