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시민 사회

 러시아와 수교를 했던 1990년만 해도 드넓은 시베리아가 우리의 자원 창고로 변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었다. 그러나 요즘 러시아에 대한 열기와 관심이 약해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러시아에 대한 관심의 퇴조가 개인의 기회 확대와 나라의 이익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경의선, 경원선 개통과 함께 우리가 앞으로 열어 가야 할 국제 철도 시대에 러시아는 그 중심에 있는 나라이며 또한 여전히 지구 자원의 보고이다. 러시아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2년 수교한 중국에는 수많은 기업이 진출해 중국 내에 한국 공단이 즐비한 지경이 되었지만 러시아에는 삼성, LG, 현대, 기아, 대우 등 대기업들만이 그 곳 시장에 진출해 있는 형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 배경이 있다. 이를 기초로 필자가 지난 여름 러시아 현지에서 체험한 시민 생활의 모습에서 한 가지 단서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던 1990년 당시 러시아의 거리는 조용했고 생활용품을 사기위해 여기 저기 차분하게 줄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상점들의 진열대는 비어 있었고 생필품의 품질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오늘의 상황은 그 때와는 전혀 달랐다. 좋은 상품이 진열대 마다 넘쳐나고 시민들의 모습은 화려하고 활기에 넘쳐 보였다. 문짝 아귀가 맞지 않는 오래 된 건물은 여전했지만 고급 아파트 신축공사가 활발히 이뤄지고 집집마다 내부 수리를 하며 고급 가구를 들여 놓고 있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면 시민 사회적 질서와는 거리가 먼 실상이 눈에 들어 온다.

 러시아에는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암달러상이 활개를 쳤다. 공식 환율로 쳐주는 은행보다 2~3배 더 쳐주는 암달러상이 공공연하게 영업하고 있었다. 지금은 암달러상 대신 공식 환전소가 지하철 역 주변이나 상가들 사이에 많이 들어서 있다. 이상한 것은 환전소를 많이 찾는 사람들이 외국인들보다 러시아 내국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러시아의 화폐인 '루블'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안정된 화폐인 달러로 교환해 놓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경제 상황이 불안정하다. 자기 나라의 경제를 믿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나라의 경제적 상황을 불안정하게 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러시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투쟁 상태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신뢰가 없다. 정부에 대한 신뢰, 정책에 대한 신뢰, 시민들끼리의 신뢰가 없다. 한마디로 국민들이 믿고 거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공권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 경찰이 불심검문하면 당연히 돈을 줘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러시아 경찰의 불심검문은 질서나 치안을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외국인들은 그들의 호락호락한 '먹이 감'이다. 그래서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행동원칙이 있다. '경찰하고는 눈을 마주치지 말라!' 이런 나라의 치안이 얼마나 안정적일 수 있겠는가?

 그 불안정함의 예를 들어 보자. 러시아에서 택시비요금은 대단히 비싸다. 그래서 타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택시들은 대부분 외국 관광객이 묵고 있는 호텔 주변이나 관광지에서만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승용차가 정부의 공공연한 묵인 아래서 자가용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시민의 택시 기사화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매번 흥정하기에 따라 택시요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동을 할 때마다 승용차 운전자들과 더불어 행선지와 가격을 흥정하는 것은 외국인들에 있어서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요금은 공식 가격이 있다. 그러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소매치기와 집시들, 스킨헤드족들이 폭력을 행사할까봐 주변 경계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대낮에도 술병을 들고 취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불안감을 준다. 일상생활에서의 이런 상황은 경제활동이나 유학생활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재현된다. 공산당 치하에서 수줍은 듯 했던 시민들은 자취를 감췄다. 활기에 넘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민적 질서를 유지하지 않는 거친 러시아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러시아 시민사회의 미성숙이 우리의 러시아 진출을 더디게 하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러시아에 시민적 질서가 잡힐 때까지 러시아 진출을 미룰 수도 없다. 그 때는 우리에게 기회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대기업 직원들이나 개인 사업자들은 러시아의 불안정한 사회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해 스스로 활동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것이 러시아의 사회라는 것이다. 경제 활동의 영역을 넓히려는 젊은이들에게는 시민사회의 질서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황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그 곳에서 활동하는 사업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