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에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겨자씨보다도 작고 좁쌀보다도 더 작으면서 동시에 이 지구보다도 더 크고, 허공보다도 더 크고, 여타의 모든 세계보다도 더 크다'라고 했으며,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에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작기로는 아주 작아 안이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세입무내, 細入無內), 크기로는 아주 커서 밖이 없는 데까지 품는다(대포무외, 大包無外)'라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인간 모두가 각각 지니고 있는 마음은 그 크기와 깊이에서 볼 때 우주 전체를 다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이며, 그 이어짐과 길이에서 볼 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발생함도 없고 소멸도 없을(무시무종 불생불멸, 無始無終不生不滅) 정도로 영원하다.

 이러한 우리들 마음의 그 깊고 크고 영원함에 관하여 치밀하게 사유했던 내용이 불교 유식학(唯識學)의 아뢰야식설(阿賴耶識說)로 나타나고 있으며, 체.게.융(C.G.Jung, 1875~1961) 심층심리학(深層心理學)의 무의식설(無意識說)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 유식학의 아뢰야식설과 융 심리학의 무의식설이 깊고 크고 영원한 우리 인간의 마음 구조와 기능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마음의 구조를 불교 유식학에서는 전 6식(눈, 귀, 코, 혀, 몸, 의식)과 제7 말나식(자아의식, 末那識), 그리고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보고 있으며, 융 심리학에서는 의식(Das Bewusstsein)과 자아(Das Ich), 그리고 무의식(Das Unbewusste)으로 보았다.

 이렇듯 두 학설은 마음의 구조에서 볼 때 아뢰야식이나 무의식을 전 6식과 의식, 그리고 제7식과 자아보다 더욱 심층의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융 심리학이 의식을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본 점이나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 원형적(原型的) 마음(Archetypus)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集團的 無意識, Das Kollective Unbewusste)이 의식의 뿌리라고 본 점 등은 유식학의 삼능변설(三能變說)에서 초능변(初能變)인 제8 아뢰야식으로부터 제2 능변인 제7 말나식과 제3 능변인 의식을 비롯한 전 6식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점과 상통한다.

 바꾸어 말하면 유식학에서는 표층심리(表層心理)로서의 전 6식과 제7식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적 근거를 심층심리인 제8 아뢰야식에 두고 있는데 이 점이 융 심리학의 입장과 만난다. 존재론적 근거를 찾아볼 때 자아와 의식의 뿌리는 무의식(특히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본 견해와 제7 말나식과 전 6식의 뿌리는 아뢰야식이라고 본 견해는 서로 상통한다.

 또한 두 학설은 이러한 심층적(深層的) 마음이 지닌 상속적(相續的) 성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융 심리학에서 개인적 무의식이 개인생활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형성되어 이후의 정신생활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본 점이나 더욱이 집단적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원형들이 태초로부터 이어지는 지속적 성질의 어떤 것으로 본 점 등은 일단 유식불교에서 아뢰야식이 현세의 신(身), 구(口), 의(意)의 행위를 업종자(業種子)로서 보존 지속시켜 줄 뿐만 아니라 삼생(전생, 현생, 후생, 前生, 現生, 後生)의 윤회상속(輪廻相續)을 가능케 하는 업력(業力)의 저장처(貯藏處)라 보고 있는 점과 만난다. 물론 상속되어 가는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가 특이성을 보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8 아뢰야식은 폭포수가 끊임없이 뒤에 오는 물줄기에 의해 바뀌는 것처럼 행위의 업종자들에 의해 부단히 전변(轉變)하면서 존재하는 종자(種子)들의 집합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뢰야식의 동적 특성은 융 심리학에서 무의식이 수많은 콤플렉스들의 집합으로써 이 콤플렉스들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면서 존재하는 것이고 특히 개인적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콤플렉스들은 의식의 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 점과 상통한다.

 즉 아뢰야식과 융 심리학의 무의식은 업종자들이나 콤플렉스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심리구조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의 성질 또한 정태적(靜態的)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動態的)인 것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심층적 마음이 지닌 상속적 성질 언급


 식(識)의 형성, 무의식설과 업종자설 일치


 두 학설, 자성과 자기원형의 중요성 '강조'

 두 학설은 심층심리로써의 아뢰야식과 무의식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것이 단순히 형태적 원리로써의 정신성을 지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표층심리의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에너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즉 불교 유식학에서 저장된 업종자들의 역동적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업력(業力)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과 융 심리학에서 본능의 역동적 성격과 무의식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 그러한 측면을 말하고 있다.

 또한 물(物)과 심(心)이 나뉘지 않고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장소로써 아뢰야식과 집단적 무의식을 내세우고 있는 점에서 두 학설은 서로 상통한다. 즉 불교 유식학에서 최심층심리인 아뢰야식이 물질적인 색법과 정신적인 심법을 함께 포괄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면서 상대적 물과 심의 대립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층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융 심리학에서도 정신계와 물질계는 마치 그 끝이 확대되지 않은 지점, 즉 본래적 영점에서는 만나나 확대될 때는 만나지 않는 두 개의 원추형과 비유될 수 있다 하여 집단적 무의식이 물질과 정신의 양극이 포괄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융 심리학에서 무의식을 개인적 그림자와 집단적 그림자로 구성된 개인적 무의식과 원형들로 구성된 집단적 무의식으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점은 불교 유식학에서 아뢰야식이 개인적 업력을 상속시켜 주는 업종자와 공통으로 지은 업력을 상속시켜 주는 업종자, 그리고 생래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본유종자(本有種子) 등을 저장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과 상통한다.

 이러한 식(識)의 형성에 자아의 행위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개인적 무의식설과 개체아의 업종자설은 일치하며, 자아의 개별적 경험이나 행위와는 관계없이 인간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것으로써 마음의 원형(原型)과 본유종자를 인정하고 있음에서 두 학설은 일치하고 있다.

 불교 유식학에서 아뢰야식의 심리층을 설명하면서 그 속에 진여자성(眞如自性)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심성이 가장 이상적 조화의 상태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아뢰야식 속의 자성(自性)에 이미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섭대승론에 나타나고 있는 금장토(金藏土)의 비유는 진여자성과 아뢰야식이 금과 흙이 모두 땅을 떠날 수 없듯이 불가분리함을 잘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융 심리학에서 각 개인의 전체성과 원만성을 찾고자 하는 원초적 심성인 자기원형(自己原型)이 모든 인간의 심층적 마음인 집단적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이라 본 것과 상통한다.

 또한 진여자성이 아뢰야식을 떠나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자기원형은 집단적 무의식에 속한 것으로 보고 그들이 영지성(靈知性)과 절대지(絶對知, Absolutewissen)를 지니고 있다고 본 점에서 일치한다. 이와 함께 원성실성(圓成實性)인 진여자성이 참으로 존재하지만 형상은 없다(진유무상, 眞有無相)고 한 삼성삼무성설(三性三無性說)에서 볼 때 진여자성은 일상적, 언어적 해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융 심리학이 자기원형을 언어적 표현의 한계 밖에 있어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점과 상통한다.

 더욱이 두 학설은 자성과 자기원형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불성론, 보성론, 능가경 등에서는 제9식이라 하여 진여자성을 그 밖의 아뢰야식보다 더 심층의 본원심(本源心)으로써 별립(別立)시켜 보려는 흐름이 있었으며, 융 심리학에서는 자기원형을 그 밖의 원형들보다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면서 자기실현(自己實現)을 최대의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

김 성 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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