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영 학 (신문방송학과 교수)

 아무리 훌륭한 기억도 흐린 먹물보다 못하다. 해방 60년 만에 일제하 친일분자들의 이름을 집대성한 사전이 나온다고 한다. 그 엄혹한 시대를 증거하는 기록들이 이제 햇볕을 받아 음습한 습기를 말리게 된 것이다. 사전 편찬 진행측은 미리 친일인명사전에 담길 명단 일부를 공개하였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이 다 알려진 그대로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름들이 수두룩하다. 

 군인들의 경우 박정희를 뺄 수 없고 문학에서 이광수나 모윤숙, 학계의 김활란, 언론계의 김성수, 방응모 등이 눈에 띈다. 정치계, 법조계 이름이 줄을 이었다. 앞으로 그 후손들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다. 친일을 부정하던 조선일보는 방응모의 행적을, 동아일보는 김성수의 행적을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주목된다.

 역사는 결코 똑같은 전철을 되밟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일이 제 스스로 그리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후세 사람들의 집요하고도 부단한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음습한 배리(背理)를 들추어 민족의 강기를 바로 세우는 일, 친일 세력이 반공 세력으로 둔갑하여 온갖 헌정 질서를 굴절시킨 일, 늦었지만 모두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아직도 과거가 아닌 우리의 현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는 한국언론사 가운데 일제하 동아·조선의 존재 양상은 다면적이었다. 그런데도 일제의 두 신문 폐간을 두고 조선은 '친일을 했으면 폐간을 당했겠느냐'고 강변했었다. 뒷날 일제로부터 인쇄시설 등의 인수대금조로 80원을 받은 일이 밝혀지자 조선은 일제가 '지불하였다'는 묘한 수사를 구사하여 '(대금을) 받았다'는 표현을 피해갔다.

 억지 부정이 한 때의 묘약일 수는 있다. 그러나 나라의 명운이 어두어 질 때마다 일제는 늘 반추해야 할 우리의 업보(業報)이다. 일제뿐이겠는가. 지닌 쿠데타 세력에 기생하여 민주 헌정질서를 굴절시킨 부류들의 음습한 행적도 맑은 바람을 쐬어야할 거풍(擧風) 대상 아닌가. 흐린 먹물이 기억보다 나은 이유이다. 먹물이 바로 설 때 역사도 밝다.

 가령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일당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린한 채 정권을 찬탈, 민주 헌정을 파국 낼 때 그 부류들과 어깨 걸고 승승장구한 지식인들의 허위를 들추어야 할 것이다. 헌정 유린 세력들에게 빌붙어, 아니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먹물을 흐린 죄를 물어야 한다. 최소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한 전력이 부끄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영광이 아닌 참담한 부끄러움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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