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Dike)
 1. 정의의 이름으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많기에 사회가 이만하게 유지되는 것일까? 아니면 법이 있어서 이만큼 사회가 유지되는 것일까? 법은 왜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이념과 가치라는 것을 꾀하기 위해 법은 존재한다. 그 무엇인가를 찬찬히 살펴보면 반드시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법대로 하자!" 당연한 말인데, 법대로 하자는 말은 뒤틀려짐이 숨어있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빼어드는 나쁜 히든카드 인양 느껴진다. 갈등이 법의 문제가 되는 순간, 정의는 뒷전이 되어버리고 누가 더 센지 대보자는 으름장이 된다.

 하나가 행복하면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 솔로몬 사례는 두 여자 중 한 사람만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조건에서만 정당하다. 두 여자 모두 아이를 사랑하고, 두 사람이 그들의 요구를 철회한다면 분쟁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판결로 아이를 한 당사자에게 넘겨진다면, 그 판결은 분명히 공정하지 못하다. 다른 당사자에게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법으로 사람을 위한다"는 이법위인(以法爲人)이랄 수 있겠는가?

 디케(dike)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정의의 여신이다. 오른 손에 칼을 왼손에 저울을 가졌고 눈을 가렸다. 왼손에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은 정의의 엄정한 기준을 뜻하고, 오른 손의 칼은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힘이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눈을 가렸다는 것은 정의는 사리사욕에 흔들리지 않고 공평무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정의만 꾀한다면 어떨까? 정의는 법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이긴 하지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다루는 기준과 내용을 정할 수가 없다.

 결국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을 가릴 기준은 다른 곳에서 찾는다. 그래서 정의와 함께 합목적성을 이야기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법은 일정한 목적에 알맞은 방법으로 존재한다. 이는 곧 법의 목적을 무엇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의 내용이 채워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세계관에 따른다면 법의 목적은 사회 불평등의 제거에 있고, 따라서 배분적 정의의 실현을 앞세운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세계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민주주의적 세계관에서는 민의의 존중, 국민의 참여가 법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한 줄기의 강이 가로막는 가소로운 정의여!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서 이렇게 상대성을 이야기했다. 자칫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법은 "내 것이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네 것도 절대적이 아니다"가 아니라 "내 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네 것도 소중하다"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정의 사회는 그렇게 다가가야 한다.

 

2. 법의 이름으로

 자고나면 귀에 익은 속삭임마냥 참담한 소리들이 난무하다. "…착하게 살면 손해다. 정직하게 살다간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남들처럼 살짝 때 묻고 사는 게 낫다. 챙길 때 잘 챙기는 게 삶의 지혜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정도라면 오히려 불편하다. 등등…"

 이런 주장에는 법을 어기면 이익이 되며, 지키면 손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욕망을 충족시키며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각자 욕망을 채우려다 보면 갈등은 일어난다. 서로 먼저, 더 많이 차지하려고 거칠게 다투고 싸울 것이다. 이때 인간은,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것처럼 인간에 대해 늑대가 된다(homo homini lupus est).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행복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공동체의 미덕이 훼손될 수 있다. 제로섬 게임 같은 판에서 어떤 근거로 합리화를 꾀할 것인가.

 중국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사람인 한비(韓非, 기원전 280?~233)는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엄격한 법 집행을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한비는 법가(法家) 사상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한비의 법사상이 오늘날 적용되고 있는 법 내용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곱씹어 오늘의 생각과 비교해 보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한비자 (기원전 280?~233)

 한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저 인간은 이해득실만을 따질 뿐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공자와 맹자의 인성론의 전제는 성선(性善)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원초적 양심이 있으며, 이 양심이 곧 도덕적 자율성 또는 자발성의 근거가 된다고 했다.

 한비는 이러한 낙관론을 인정하지 안했다. 사람의 이해관계는 늘 어긋난다. 예를 들어 군주와 신하가 생각하는 이익이 다르고,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도 이해는 서로 엇갈리게 마련이다. 특히 군주와 신하는 남남끼리 만나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이므로 군주가 신하에게 충성심만을 요구한다든지 도덕만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한비는 이들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으로 법을 제시한 것이다.

 법가는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하는 전국 시대 말기의 제자백가 중 한 파이다. 중국 역사에서 춘추와 전국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늘 싸움질만 하던 시대였으니, 세상인심은 흉흉하여 '예와 악이 붕괴된'(禮樂崩壞)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한비는 그러한 시대에 남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내 나라가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강력한 통치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빈틈없는 권력체계를 갖추는 것이 통치의 핵심이었다.

 

 3. 그래도 다시 정의의 이름으로

 흔히 법을 아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직 법리에 따라서만 해석을 하며, 재판은 법조문의 내용을 적용한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법치주의는 인간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가 실현되었을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물인 법은 인간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사실, 법의 지배라는 용어 그 자체는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법은 지배할 수 없다. 지배는 행위이며, 법이 직접 행위를 할 수 없다. 법은 법적용자들이라는 현실의 사람들을 통해 해석되고 운용되는 것이다. 법이 혜택 받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악용될 경우, 법의 지배는 법에 '의한' 지배로 전락하며, 법과 정의는 힘 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비의 법은 무엇이 문제였나. 그의 법은 군왕의 통치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다소라도 백성을 보호할 뜻이 있었다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자기 자신을 위해 변호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법에 그런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비의 법이 지닌 가장 큰 문제이자 모든 법가의 법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문제였다. 법의 집행은 엄격하고 분명해야 하지만 법을 제정할 때는 또한 정리(情理)에 부합해야 한다. 사람은 때로, 아니 많이 선하기도 하다. 인간의 선함을 불신한 한비는,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법이 꾀해야 하는 정의란 단순한 보편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이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숱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의 끊임없는 요구다. 정의 실현을 꾀하지 않는 법이나 국가는 단순한 실력이나 폭력의 조직화이지 법치국가가 아니다.

 민주사회에서 힘만 생각하는 권력자가 법치주의를 들먹거리는 것은 서부극에서 악당이 정의를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법치주의는 권력의 횡포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의는 행해져야 한다.

장규원 교수 (경찰행정학부)

<필자소개>

-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법학사)

- 동국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박사, 형법 전공)

- 현재 원광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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