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들여지는 ‘글’
 인류의 발전에 관한 여러 증거, 여러 기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 생각에 인류가 걸어온 지난 시간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길’과 ‘글’이 아닌가 싶다.
 인류사가 진보해온 모습은 정교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도로망의 모습과 같다. 물론, ‘길’을 바라보는, 이성진보주의적 터널식 역사관에는 환경 파괴나 ‘개화’라는 이름의 획일화된 폭력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 발 두 발 인간은 자신의 앞에 닥친 거대한 운명을 온 몸으로 밀고 나왔다. 그게 ‘길’의 역사다.
 ‘글’은 새삼 강조할 것도 없이 ‘역사’, ‘문명’과 동의어를 이루는 말이다. 문자의 출현을 통한 기억의 축적과 지식의 전승,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의 역사가 우리 문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모두 낱낱이 ‘글’로 기록되었다. 깨치기 위해서 글을 익히고, 글을 통해 또 깨친다. 한 집단의 꿈과 정체성을 담은 고대 서사시로부터 ‘집단 지성’의 한 표상인 ‘위키피디아’에 이르기까지… ‘글’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시공간에 놓인 ‘길’이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위한 생각   
 '아프로 유라시아(Afro-Eurasia)'는 사실상 하나로 묶여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초대륙이다. ‘인류 최초의 어머니 루씨’를 상정하는 진화론적 관점에 따르면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고, 지금도 세계 인구의 85%가 여기 산다.
 이 광활한 대륙 위로 흐르는 거대한 시간의 물결은 21세기 현재 우리들 삶의 모습을 추동했으며, 매우 다채로운 형태의 물무늬(文)를 그려 놓았다. 인류 문명사를 뒤흔든 혁명적 개인이나 집단, 사상과 종교도 모두 이 초대륙에서 출현했으며, 이같은 다양성은 새로운 형태의 충돌과 갈등을 재생산하는 역동성이 되기도 한다.
 아시아의 동북방에 자리 잡은 우리 나라는 중세 이후,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소통에 제한이 있었고, 근대 이후 아시아 각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았으며, 분단과 냉전 질서 속에서 자의는 아니지만 유폐적인 외교 관계를 펼쳐왔다. 이런 연유로 실크로드,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같은 단어들은 낭만적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교통로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이렇게 울울한 20세기를 통과한 우리에게 어느날 ‘이븐 바투타(1304~1368)’라는 낯선 이름이 들려왔다. 1325년, 아프리카를 출발해 아시아를 순방하고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의 북쪽에 자리잡은 이베리아 반도를 둘러본 뒤, 사하라 사막 서쪽의 아프리카 내륙에까지 족적을 남긴 이… 21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난 그는, 그 진귀한 여행의 기록을 남기라는 왕명에 의해 1355년 다시 고향 땅에 돌아오기까지 무려 30년을 ‘길 위의 인간’으로 산 사람. 그의 발길이 닿은 거리를 도상만 측정해도 무려 10만 킬로미터. 이븐 바투타는 20대부터 50대까지, 가장 빛나던 시기 30년을 자신의 길을 닦는 일에 오롯이 바쳤으며, 10만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는 자신의 행적을 한 권의 책으로 수습하였다.
 한 권의 책!
 그렇다. 이븐 바투타라는 낯선 이름이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걸은 ‘길’에 대한 행적이 고스란히 ‘글’로 남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통한 생각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속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은 모두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북경을 찾았을 때는 원나라 시대이고, 그의 여행기의 주요 배경이 되는 지역은 우리가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며 인도 또한 이슬람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중앙아시아의 대상 무역 중심지 또한 이슬람 문명의 강력한 자장권 중심부였다.
 사실 우리가 아는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여행기는 경이롭다. 이름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여행기 속의 풍경은 독자에게 그야말로 ‘낯선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같은 ‘이국(異國) 취향’만으로 이 여행기가 700년을 뛰어넘는 의의와 가치를 생산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풍경은 형제애로 가득한 이슬람 문명의 평화로운 유대와 관용의 모습이다. 필자가 비록 모로코의 명문 사족(士族) 출신이긴 하지만, 그는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어려움을 생면부지의 이슬람 형제들을 통해 해결한다. 더구나, 이븐 바투타가 족적이 남은 지역이 현재 ‘탈레반’, ‘알 카에다’, ‘빈 라덴’, ‘문명의 충돌’, ‘화약고’와 같은 단어를 연상시키는 지역이란 점에서 놀라움은 더욱 배가된다. 그곳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족하고 여유로운 곳이었다.
 그렇다고 이때가 그저 모두 평화로운 이상 시대로 그려졌다는 뜻은 아니다.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던 이슬람 문명은 몽골 기병들과의 역사적 조우를 통해 더욱 크게 세력권을 넓혔고, 식구가 많아지면 분가하게 마련인 것처럼, 각 지역이 독자적 다극화의 길을 걷고 있을 때가 이 때였다. 오해나 불신의 뒤를 잇는 비하와 적대감, 호승심도 싹틀 때였다.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두 번째 의의는 바로 이런 데서 발현한다. 대륙과 국경을 넘어, 동일한 언어(이 경우 아랍어)와 동일한 종교를 공유한 이슬람권이 자기 분열을 통해 다시 신생의 에너지를 획득하는 놀라운 광경 그리고, 낯섬과 다름을 인정하는 모습!
 이제 더는 하나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더 큰 둘이나 셋으로 나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대의 활기가 이 책이 보여주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이 있으면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고 산다. 작은 갈등을 묻어두어 더 큰 갈등이 일어나게 조장하는 소극적 방관자부터 부러 불화와 충돌을 강조하며 삶의 방향을 갈등 지향으로 왜곡시키는 적극적 선동자까지,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까 보다, 어떻게 이용할까에 더 관심을 많이 두는 이들로 가득 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의한 생각
 여행을 모티프로 삼거나, 여정 자체를 글로 재구성하거나, 거기서 보고 느낀 점에 대한 자신의 감상이 주가 되는 글 모두를, 범박하게 ‘여행문학’이라고 정의한다면 여행문학의 역사가 곧 문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나 흔히 서구문학의 원천으로 이야기되는 ‘오딧세이아’가 모두 여행기의 형태로 구성된다. 낯선 곳을 찾아 떠나고, 시련을 겪고, 마침내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 귀환하는 이야기는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매우 매혹적인 모티프로 자리잡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갈등의 발생과 진행 그리고 해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게 되는 인생의 여정과 여행기의 서사 구조는 빼다 박은 듯이 서로 닮았고, 또 여행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난관과 모험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류의 꿈과 열망이 구현되는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양식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여행문학의 요체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가보지 못한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지적 갈증과 그 공간을 주유하는 여행객의 마음 행로를 쓰고 읽기 위하여 우리는 길에 나서고 책을 읽는다.
 그렇게 여행객이 돌아와 앉은 서탁 위에는 그가 지나온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그 시간 속에는 공간과 시간과 마음의 풍경이 담겨 있다, 마치 아직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그 중에는 흘러온 시간 속에 빛이 바랜 풍경도 있을 수 있고, 외려 더욱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풍경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기억 속에서 호출된 풍경은 다시 서사를 낳는다. 서술이든 묘사이든 자신이 통과한 시간에 대하여, 자신이 스며들었던 공간에 대하여, 모두 다 다른 표정을 지난 숱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당시 자신의 느낌에 대하여… 기술자(記述者)로 변신한 여행객은 자신이 만난 숱한 풍경 중에서도 가장 눈여겨보았던, 가장 크게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던 풍경을 선별하기 시작한다.   

 길, 인류가 온 몸으로 그려낸 글     
 무엇이 이 여행객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이븐 바투타 혹은 많은 이들의 여행 저작물들을 보다 보면, 여행자들이 눈여겨 보는 장면은 대개 비슷하다.
 ‘같음’과 ‘다름’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또 기록된다!
 여기도 나와 같은 사람이, 같은 풍습이 있구나… 기억하는 마음 속에는, 따뜻한 박애주의가 흐르게 마련이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익숙함이야말로, 긴장에 지친 여행객들에겐 가장 큰 선물일 터, 여행자들이 이를 가장 기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으로써, 후대의 독자들에겐 일종의 문화 지도가 그려지게 된다. 
 ‘다름’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방식은 ‘같음’과는 또 다르다. 저게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구나, 라고 인식하는 것은 ‘나는 대개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의식이 강하게 작용해야 가능한 일이다. 즉, ‘다름’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과정은 그 글을 쓴 이의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설레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이 계속될수록 여행자의 판단에는 자기수정과 보완이 가해진다. 따라서, 여행자의 발길이 닿는 지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여행자의 안목과 식견도 넓어진다는 뜻이며, 그 마음길을 따라 가는 독자들의 길도 더욱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과 마음으로 탐험하고자 욕망하는 이들 앞에, 아직도 거친 무인지경은 너르게 펼쳐져 있다. 여행자가 발을 치켜 들 때마다 그 앞에는 미지와 미래가 놓여 있다. 미래와 미지는 허공을 가득 메운 계단과도 같다. 한 발자국 내밀어 내일을 밟고, 또 한 발자국 내밀어 더 먼 미래, 더 낯선 미지의 세계에 들어선다.

김병용 교수(소설가, 여행작가)

<필자소개>

-전북대 국문과 및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0년 [문예중앙] 중편소설 부분에 당선

-[그들의 총], [개는 어떻게 웃는가] 등의 소설작품집과 [길은 길을 묻는다], [길 위의 풍경] 등의 기행문집 출간. 연구서 [최명희 소설의 근원과 유역] 발간.

-현재 전북대 한국어 교육센터 선임연구원 겸 미국 국무부 CLS 프로그램 한국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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