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시작과 식민주의

 근대(modernity)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것은 근대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난감한 질문이다. 세계사적 근대가 시작된 지 수백 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이 '어떻게'의 문제는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태다. 그것은 근대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떻게'에 대한 설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근대를 르네상스, 산업혁명, 시민혁명과 관련해 바라보면 근대는 인류사의 거대한 진보이고, 당연히 유럽은 이 거대한 진보의 모델이 된다.

 물론 근대에 진보적 측면이 존재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순간 근대가 감춰왔던 부끄러운 이면(裏面)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표적인 것이 식민주의이다. 근대라는 이름의 진보를 만들어낸 창조자로 칭송받았던 유럽이 식민주의의 창조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근대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유럽의 근대가 식민주의와 어깨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유럽의 근대가 식민지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1789년 프랑스의 무역액은 1,700만 파운드였는데, 그 가운데 아이티와의 무역액이 1,1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아이티라는 식민지 없이는 프랑스의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었던 셈이다.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근대를 창출한 원동력이라는 비밀은 이제 공공연한 상식이 되었다. 근대를 극복해야 한다는 화두가 우리 시대의 공안(公案)이 된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연한 상식이 어째서 수백 년 동안 비밀로 묻혀온 걸까. 그것은 유럽, 좀더 넓혀 말하면 서구가 식민지배를 문명화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당화 작업은 피식민지 사람들조차 식민지배에 따른 고통을 문명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댓가로 생각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병합할 때도 그러했다. 한일병합에 적극 동조했던 친일파들 가운데 상당수는 식민지배를 조선을 문명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통과의례로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미국을 스탠다드로 여기며 서구중심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문명화 담론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오리엔탈리즘, 식민지배의 관념화

 문명화 담론과 서구중심주의를 세계에 유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만들어낸 동양에 대한 일련의 관념체계를 가리킨다. 서양은 오래전부터 서양 대 동양의 이분법에 기초해 동양을 서양의 타자-곧 반(反)서양-로 재현해왔다. 기독교-선 대 이슬람-악 식으로 이분법에 기초한 동양의 이미지는 서양의 반대가 된다. 당연히 그것은 부정적인 모습을 띤다. 그래야 동양을 타자화시킬 수 있고, 그 반대편에 서양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고정관념인 동시에 서양의 순수한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한 셈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정치, 경제, 문화, 역사,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가령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동양 하면 우리는 곧잘 전제정치를 떠올리곤 한다. 헤겔은 동양의 전제정치는 워낙 오래되고 견고한 것이어서 역사의 진보가 불가능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로부터 서양-진보 대 동양-정체의 이분법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동양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진보, 곧 문명화를 수행할 내적 동력이 결여되어 있는 셈이다. 동양이 서양의 식민지배를 통해 문명화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문화 분야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떨쳤다. 관능성, 원시성, 야수성, 향토성, 목가성과 같은 문화적 이미지들이 사실은 서양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흔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우리의 향토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수작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봉평은 실제 봉평과 거의 관련이 없다. 당시 봉평의 민중들이 겪고 있던 극도의 궁핍상이나 삶의 애환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은 역사적․지역적 리얼리티가 소거된 가상의 목가적 향토일 뿐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관광객이 자가용 타고 드라이브하면서 보는 농촌의 풍경과 비슷한 것이다. 관광객에게 그 농촌은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전원이지만, 거기서 일하고 있는 농부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고단한 전쟁터이다.

 헤겔이 동양을 진보가 부재하는 세계로 본 것이나 플로베르가 동양을 관능성이 넘치는 공간으로 본 것은 이들이 서양인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서양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이란 너무도 완강한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어째서 봉평을 목가적 향토로 그린 것일까.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이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이효석에게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적 상상력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실제 봉평을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효석에게 목가적인 향토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셈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근대화될 수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 또한 정체성과 타율성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관념이 실제 현실이 되는 전도(顚倒) 속에서 나온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뿐 아니라 동양인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내면화되어 있다. 탈오리엔탈리즘 없이는 탈식민이 어려운 것도 그래서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허구성과 탈식민 담론

 오리엔탈리즘의 허구성을 폭로해 탈식민의 선결과제가 탈오리엔탈리즘임을 밝혀낸 대표적인 학자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학자로 죽기 직전까지 제국주의와 서구중심주의에 맞서 싸운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가 1978년에 출간한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와 구조와 논리를 치밀하게 분석해 탈식민 담론의 역사에서 우뚝한 봉우리를 이룬 기념비적 명저이다. 한국의 탈식민 담론들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저서가 끼친 파급력은 넓고도 깊다. 물론 이 저서는 오리엔탈리즘을 지나치게 절대화해 그에 대한 저항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결정적인 결함도 갖고 있다. 한국의 학계에도 그 부정적인 영향이 깊게 각인(刻印)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 학계와는 반대로, 사이드 본인은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의 결함을 자인(自認)하고 <<문화와 제국주의>> 같은 저서를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극복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했다.

 오리엔탈리즘이 동양 혹은 한국에 끼친 영향이 심대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단일하지 않다. 식민주의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식민주의의 위력이 엄청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피식민자 없이는 식민주의는 생존할 수 없다. 요컨대 식민주의는 기생충처럼 피식민자에 기생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허약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의 정체성은 동양을 전제로 해서만 정립될 수 있다. 서양이란 기실 반(反)동양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가상인 것처럼 서양의 정체성 또한 동양을 타자 삼아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동양 대 서양이라는 이분법은 항상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실제에 기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가 말하는 순간부터 탈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된다.

하정일 교수 (국어국문학과)

<필자소개>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 현재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민족문학사연구소 대표,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소장

- 저서 : 『20세기 한국 문학과 근대성의 변증법』,

『분단 자본주의 시대의 민족문학사론』, 『탈식민의 미학』 등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