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과학의 과거
20세기 전반기 서구 학계에서 인간 및 동물의 심리 및 행동연구의 패러다임이었던 행동주의 심리학를 밀어내고, 1950년대 초 사이버네틱스, 정보(처리)이론, 서보이론, 컴퓨터이론 및 기술 등을 배경으로 계산학, 심리학, 언어학 분야에서 태동된 인지혁명은 뇌 과학, 인류학, 철학 등이 가세하면서 ‘마음’의 경험과학적 연구를 표방하는 인지과학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약 반세기에 걸쳐 인지과학은 그것의 기반이 되는 철학적 이념의 변화와 함께 꾸준히 거듭나고 있다. 본 글에서 필자는 인지과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그것의 저변에 있는 핵심이념들을 중심으로 조망해 보고자 한다.
 
 인지혁명의 주체는 무엇보다도 디지털컴퓨터였다. 그런데 컴퓨터가 마음/인지이론과 연결될 수 있었던 계기는 컴퓨터이론의 대부인 튜링이 모방게임의 맥락에서 지능을 정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수행하는 문제풀이성취를 어떤 한 기계가 모방할 수 있으면, 그 기계는 지능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인간이 수행하는 자연인지는 컴퓨터 유비를 이용해 설명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컴퓨터가 기호의 입력, 정보처리과정 그리고 출력이라는 순차적인 작업을 거치는 동안, 인간이 수행하는 인지과정 및 성취는 지각/재현-인지/계산-행동이라는 선형적 과정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모방, 즉 기능적 동일성을 매개로 컴퓨터가 인지설명의 매체가 되고, 게다가 컴퓨터작동의 근간이 되는 프로그램이 물리적 수준도 의미적/정신적 수준도 아닌 제3수준에서 조작되면서, 마음과 물질의 분리, 환원에 기초한 심신이원론, 정신주의, 심신동일론, 제거주의 등과 구분되는 기능주의적 마음모델이 창안되어, 1세대 인지과학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정보처리이론은 학습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내장된 프로그램은 고정되어 변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1980년대 들어 기호 및 정보의 재현 그리고 그것들의 처리과정이, 마치 뇌 신경망과 유사하게, 노드들 간의 복수적인 상호연결과 입출력층을 매개하는 숨겨진 층(hidden layer)의 도입을 통해 노드들 간의 연결강도가 0과 1(혹은 온/오프) 사이의 소수적 연결 강도를 가질 뿐 아니라, 그것도 재조정이 가능하게 되면서 해결된다. 이 연결주의적 모델이 2세대 인지과학을 형성하게 된다.
 
인지과학의 현재
1, 2세대 인지과학의 철학적 공통 기반은 인지가 기본적으로 뇌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가정이었다. 이는 기호의 의미나 인지내용이 시스템 내부 기제에 의존해 결정되는 반면, 신체나 환경 혹은 상황 등은 인지형성에서 이렇다 할 아무런 능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1990년대 이후 체현(embodied)-, 상황(situated)-, 부속(embedded)-, 확장(extended)-, 분산(distributed)-, 활성화(enacted) 인지라고 하는 이론들이 출현하면서 시작되어 아직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필자가 구현주의 인지과학이라 칭하는 이 흐름은 인지 설명에 있어 전통적으로 상정되어 왔던 심신의 분리 및 뇌 - 신체 - 세계/환경의 분리를 재봉합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지각에서 전언어적 기능인 신체 기능이 하는 역할을 강조했던 메를로-퐁띠의 몸 철학, 행위와 지각의 분리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지각과 환경과의 직접적 접속을 강조했던 생태심리학자 깁슨의 어포던스이론, 인간을 근본적으로 ‘세계-내-존재’로 규정했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해석학 등이 90년대 이후 재발견 되어 활용되는 가운데, 브룩스는 내적 재현 없이 세계 자체를 모델로 해서 지각-신체-환경 싸이클에 근간해 지능적 능력을 요하는 과제를 해결하는 로봇을 창안해 구현주의 인공지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트레바르탄, 레이코프와 존슨, 바렐라, 톰슨, 로쉬, 갤러거, 노에 등 일군의 인지이론가들이 신체구조 및 활동이 인지를 규정하는 역할을 드러내 보였고, 클락, 찰머스, 윌슨, 허친스 등은 인지가 두개골의 경계를 넘어 환경으로 확장/연장/분산되어 일어난다는 점을 다양한 형식으로 보였다.
 
 이와 함께 인지는 지각-운동 사이클 및 개인-환경 사이클 하에 일어나며, 이러한 공시적 관계가 통시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가령 체험, 학습, 발달 및 진화해 가면서 인지생산의 각 요소들이 재귀적으로 재생산 및 공진화한다는 다이내믹이론이 전개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심적 과정과 두뇌, 두뇌와 신체, 신체와 환경/세계/타자 간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 관련 데이터 및 방법론들도 출현하고 있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1980년대에 짧은 꼬리 원숭이의 전운동피질 F5에서 발견된 거울신경(mirror neurons)인데, 연구에 의하면, 거울신경은 원숭이들이 스스로 운동을 할 때나, 다른 원숭이의 운동을 지각할 때에도 활성화된다. 그렇다면, 거울신경은 지각과 운동을 상호 연결할 뿐 아니라,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 및 협응, 타자이해 등을 매개하는 메커니즘이 되는 셈이다.
다른 한편, 바렐라는 ‘신경현상학(Neurophenomenology)’ 프로그램을 통해, 메를로-퐁티의 키아즘(Chiasm) 개념의 전통을 이어, 1인칭 시각을 사용하는 현상학과 3인칭 시각을 사용하는 뇌 과학의 상호 만남을 주선하면서, 전통적으로 자연과학에서 배제되어 왔던 의식의 문제를 도입함과 동시에, 인문학적 연구에서 배제되어온 자연과학적 방법 및 결과들이 수렴해, 의식과 신체를 서로 접목하고 있다.
 
 이 외에도 마음-신체-환경 간의 인터페이스 문제는, 이것이 라캉에게서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토폴로지론적으로도 연구될 수 있다. 다만 이 연구는 아직 성취보다는 과제의 성격이 강하다.
 
 인지과학의 패러다임은 인지주의적 방향의 1, 2세대를 거쳐 3세대로 나아가면서 이전에 배제되었던 행동주의가 인지주의와 통합되어 새로운 합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연구대상으로서의 인지가 추상적/오프라인 인지에서 실세계/온라인 인지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인간상도 인지적 자아에서 체화/구현된 자아(클락은 이러한 인간의 특징을 ‘태생적 사이보그’(natural born cyborg)라는 명칭으로 칭하고 있다) 혹은 탈아적 자아 개념으로 이행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변화된 연구대상 및 연구방법을 동반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가령 인지가 일어나는 장소가 뇌를 넘어 환경으로까지 뻗쳐나감으로써, 연구의 대상은 개인인지를 넘어 사회인지, 집단인지로 나아가고, 그리고 이와 함께 자연과학적 연구 및 실험적 방법 외에도 사회/문화과학적, 인문학적 연구 및 현상학적, 해석학적 방법이 채용된다.
 
 다른 한편, 1, 2세대의 추상적 계산인지가 서구의 논리적 인지를 닮아 있고, 3세대의 구현인지가 동양의 전일주의적 사고방식를 닮아 있는 동안, 구현주의 인지과학과 함께 동양적 사고에 대한 관심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가령 바렐라의 불교인식론에 대한 관심이 그 한 예이다.) 그리고 인지의 구성요소를 구현주의적으로 파악하는 동안, 인지/마음 관련 교육이나 치유에서 내적 마음이나 뇌 이외에도 신체, 환경, 상황 등은 중요한 조작적 요소들로 여겨질 수 있어 다양한 교육 및 치유의 방법들이 고안될 수 있다. 
 
 
 
인지과학의 미래
하지만 구현주의적 전회와 함께 인지과학의 토대가 완수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령 인간들이 수행하는 인지가 늘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 인지만은 아니라는 점과 관련해 있다. 사실 우리는 늘 실제상황에서(온라인 인지)만이 아니라, 가상적 혹은 가설적 상황(오프라인 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중첩되어 있는 상황들에서도 인지를 수행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인지과학에 부과되는 중요한 과제 하나는, 오프라인 인지와 온라인 인지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이념 및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다. 1∼3세대 인지과학을 통해해야 하는 이 과제의 해결과 함께 4세대 인지과학이 도래하지는 않을까?
이기흥 교수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