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한 여름이 지났습니다. 돌이켜보면 무력하기만 했을 나날이었지요. 종잡을 수 없는 시간에 치여 지냈었고요. 늘 그래왔지만 해답이 안 나오지 생각의 생각 끝에 대책 없이 빠지기도 했어요. 남들은 저를 보고 손가락질 주며 병들었다 하며 얼굴이 찌듭니다. 그간 실컷 농락당해도 당연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 손, 생채기에서 막 아물기 시작한 마음, 세월과 세월을 건너 까마득한 당신을 보고 또 봅니다.

 그러나 그마저 오래 붙들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이미 예고 없이 다가온 한 시절을 또 견디고 헤아려야 하나봅니다. 언제 내 마음에 당신을 발들이게 했는지 내가 언제 발뺌을 놓았는지 나로부터 당신이 떠나지 않았기에.

 어쩌면 세상은 변할 채비 없이 각자 갈 길을 가는 길목에 버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일테지요. 누가 누구를 속이고 속였는지 분간이 서지 않는 시간을 감내하는 몫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기억을 경멸하면 할수록 가깝고 먼 숨소리는 막막한 꿈을 꾸고 난 듯 꼭 되풀이 되네요.

 어둑어둑해지는 꽃나무 그늘을 따라 당신이 있지 않은 곳을 일부러 찾아갑니다. 몇 번이고 못내 놀란 사랑 역시 마음과 마음을 옮기며 자리를 내주어야할 노릇이구요. 슬픔과 고통이고 오만 잡것들이든지 당신은 내 귀에만 들리는 낮은 노래이거나 숨길 수 없는 노래라지요. 당신의 먼 길을 맞거나 보내거나 이젠 여러 차례 가쁜 장난이 끝났습니다. 나의 당신은 마주 손잡을 일 없이 애써 마음 잡히면 우리가 멎은 곳에서 다시 시작 되었지요.

 그렇게 몇 번이나 가장 더러운 진창으로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나는 오래 더럽혀질 줄 알았습니다. 자리하지 않는 믿음과 당신의 중심을 원망하며 나의 서러움은 너무 빠르거나 늦었지요. 허나 기어코 당신에게 이끌려 흐르고야 맙니다.

 삶의 고통과 절망이 즐거움과 쾌락을 껴안고 꿈을 꾸기 시작하고 끝에 깃들어도 당신이 가지 못한 길을 나는 다 걸어야 합니다.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눈물을 가슴에 새기며 당신이 오고간 흔적은 여간해 지워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끊어지거나 이어지는 물 위에서 낱낱이 밝혀집니다.

 당신이 있어 가보면 그곳에 당신이 없고 한없는 희망과 절망으로 무덤을 짓고 있었지요. 우리는 폭풍의 한가운데 따로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였습니다.

천 명 구 (인문학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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