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면 <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는 지금 우리 시대의 학문과 사유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화두나 이슈를 짚어보고 이를 통해 미래의 방향까지 가늠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세계고전강좌》는 고전과의 대화를 통해 시대와 문명, 인간과 자신을 이해하고 오늘의 현실을 사유하는 열린 정신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우리대학뿐만 아니라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 두 가지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I. 군사사상가 클라우제비츠란 누구인가?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에 태어나 1831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시대를 거치면서 프로이센이 혁명적 변화를 겼었던 시대에 살았다. 클라우제비츠는 1792년 12세의 소년으로 군문에 입문하였다.
1801년 그는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했는데, 당시 교장이던 샤른호스트와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샤른호스트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신적 師父라고 할 정도로 전쟁연구에 정진하도록 지도하였고, 그의 운명을 결정이었던 인물이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전략가로서 클라우제비츠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에서 그는 조국 프로이센의 군사적 패배와 정치적 붕괴를 목격했다. 1806년 아우구스트 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패배한 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듬 해 가을까지 10개월 동안 프랑스에 억류되었다. 이 동안 그의 사색과 프로이센과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프랑스 피아에 대한 관찰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1807년 틸지트 평화조약 이후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스트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 프로이센군의 개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군 개혁의 수뇌부인 샤른호스트의 개혁이론과 논리를 개발하고 주장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샤른호스트는 그가 제시한 원리들을 지혜롭게 실천했다. 그러한 프로이센군의 개혁은 후일 나폴레옹 해방전쟁(1812-14)에서 승리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 군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이론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론의 주 임무는 법칙, 규칙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판단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1809년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군에 복귀한 후 샤른호스트의 추천으로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10월 30세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812년 클라우제비츠는 부득이하게 조국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로 군복무를 이동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1813년 3월, 클라우제비츠가 대불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군에 복귀를 자청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를 거부했다. 1812년 그의 러시아군 복무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그는 러시아군복을 입은 채 샤른호스트의 비공식적인 보좌관 역할을 했다. 
클라우제비츠가 단순히 참모장교나 전쟁이론가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할 기회가 왔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상황이 급변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제3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워털루(Waterloo)전투 직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극적으로 승리하여 나폴레옹의 沒落을 결정짓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클라우제비츠는 라인 군단에 전출되어 그나이제나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군생활의 전성기가 시작되려고 하였다. 1818년 38세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군 생활에서 그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프랑스에서처럼, 프로이센에서도 보수반동세력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유주의, 진보개혁세력은 탄압을 받았다. 그는 閒職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40세의 클라우제비츠는 베를린 전쟁학교 교장이 되었지만, 실권은 없었다. 현실세계에 대한 失意에 빠진 클라우제비츠는 필생의 野心作 <전쟁론>을 집필하게 시작하였다.
그는 군인의 열정으로써 정치적 관점에서 전쟁을 규명하였으며, 철학적 이성으로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경주하였다. 클라우제비츠는 51세가 되던 해인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II. 전쟁론이란 어떤 책인가?
<전쟁론>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전쟁론>은 철학책이자 논리학 책이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철학적변증법적 논리로 전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론적 혹은 이상적 전쟁으로 절대적 전쟁을 상정한 이후, 이를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의 현실적 전쟁을 설명하는 식의 논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둘째, <전쟁론>은 정치학 책이다. 현실과 무관한 순수이론의 관점을 배격하는 한편, 현실생활에 실용적으로 적용되는 책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은 정치의 한 도구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전쟁은 정치라는 펜 대신 칼을 사용하는 것이다.” “전쟁은 자신의 고유한 문법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등과 같은 명제에서 <전쟁론>이 정치학 책임을 잘 알 수가 있다.
셋째, <전쟁론>은 군사학 책이다. <전쟁론>은 전쟁 전체의 본질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와 요인들이 무엇인지 그 요소와 요인들간의 본질적 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혀놓은 책이다. 또한 <전쟁론>은 즉 전략과 전술이란 전쟁술, 다른 말로 싸우는 방법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다루고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본질을 일종의 ‘兩者간의 決鬪’로 간주하여 합리적 인식을 기초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정당한 전쟁’이나 ‘정의로운 전쟁’에 관한 여부는 철학자의 몫으로 위임했다.
“그러므로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구현하지 위해 적에게 강요하는 폭력행동이다.” “물리적인 폭력은 전쟁의 수단이고, 적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은 전쟁의 목적이다.” 즉 이 목적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 적을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어야 하며, 이것은 이론상 전쟁의 고유 목표이다.
그는 전쟁을 정치의 한 道具로서 파악했으며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지닌 주체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즉 전쟁은 전쟁의 목표 설정, 전쟁에서 운용되는 전투력의 강도 등을 결정하는 정치적 동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2중 형태를 지적하는 바, 적의 완전한 타도를 지향하는 절대적인 전쟁(Absolute War)와 제한전쟁의 형태인 현실적인 전쟁(Realistic War)이 그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戰術(tactics)이란 전투에서 전투력의 운용에 관한 지도(가르침)이며, 전략이란 전쟁목적을 위해 전투의 운용에 관한 지도(가르침)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전략에서는 전투력의 시간적, 공간적 집중 원리, 전략적 예비 및 전투력의 절약 원리 외에 정신적, 물질적, 수학적, 지리적, 통계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파했다.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클라우제비츠는 기존의 군사전략가들이 간과한 정신적, 물질적 요소를 중시한 점이다.
원래 전략(strategy)이란 용어는 고대 그리스 장군의 용병술이라는 strategia에서 유래가 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은 단지 승리를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국 직접적으로 평화에 이르는 목표들을 보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클라우제비츠가 전략문제에서 가장 중요시한 점은 정치지도자와 야전사령관이 전쟁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이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프로이센 중심의 국가전략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한계점이 보인다. 결론부문에서 장차 프로이센이 나아가야 할 군사대비태세에 대한 내용을 기본사상으로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사상가 이전에 애국자였다.

III. 새로운 전쟁과 전략의 대중화
오늘날 군인과 정치가들에게 전쟁의 정치적ㆍ사회적 본성에 따라서 전쟁을 냉철하게 현실적으로 평가하는 과업과 아울러 전쟁을 미연에 방지ㆍ억제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불가피하게 수행해야 할 경우 올바른 판단력으로 건전한 결정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전쟁의 양상이 제한전쟁-총력전쟁-인민전쟁을 거쳐서 21세기의 신종 전쟁인 9.11이후 ‘테러전쟁’으로까지 발전하면서 현대전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른 전쟁서 고전들, 조미니의 <전쟁술>이나 손무의 <손자병법>에 못지않게 그 가치가 더욱 증대되었고 시사하는 바가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이주천 교수 (사학과)

<필자소개>
-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indiana UNIV. of pens 사학과 서양사(석사), 고려대학교 사학과 서양사(박사)
- 뉴라이트 전국연합 공동대표
- 원광대학교 대학원 교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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