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 - 만해 한용운과 백학명

 

 만해 한용운의 한시로 본 백학명


 백학명의 승명은 '계종', 학명은 '아호'


 박중빈과도 교류, 원불교 대호법 서훈


 만해는 1919년 3·1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공약삼장을 썼다. 일제하 옥고에서 풀려난 만해는 독립운동 참여자들의 변절을 참담하게 지켜보다 강원도 백담사에 칩거, 「'님'만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시집 『임의 침묵』을 썼다. 독립운동가, 선승, 시인인 만해의 일생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만해는 생전에 참으로 많은 사람과 교유하였다. 그의 한시에 거명한 이름만도 수십이다. 그 많은 교유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인 백학명 선사는 부안 변산의 월명암에 부임하기 전에는 고창의 양진암에서 만해를 불러 쉬어가도록 배려하였다.

 이 글은 만해 한용운이 남긴 한시에 의지하여 비교적 생소한 백학명 선사의 면모를 짐작해 보려는 의도로 작성하였다. 만해는 백학명보다 12살이 아래이다. 만해가 언급한 학명에 관한 한시를 서정주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양진암에서 떠나며, 학명스님에게(養眞庵臨發贈鶴鳴禪伯)
「세상 밖에 극락도 적으려니와/사람새엔 지옥만 퍽 많습네다/장대 위에 꼿꼿이 서 있는 꼴로/한 걸음도 앞으로 안 걸립니다 그려」(世外天堂少/人間地獄多/佇立竿頭勢/不進一步何).
 
'장대 위에 서서 그 한 발작을 넘지 못하는(不進一步何)' 시구는 선 수련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와 유사한 발상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구절을 이원섭(李元燮)은 '왜 한 걸음 내닫지 않는가'라고 옮겼다. 원뜻에 더욱 근접한 번역이다. 그 뒤를 이은 나머지 4개의 구는 다음과 같다.

「일마다 막다른 괴롬 수두룩하니/만나도 이별키가 알맞구먼요/세상일 굳이 다 이러하여서/사내라 발길 따라 가볼 뿐이요」(臨事多艱劇/逢人足別離/世道固如此/男兒任所之).
 
미당의 해설을 빌면, '형님의 암자이니 좀 쉬었다 가라'고 초대했는데, 둘째 행에 보이듯, 발길이 총총하여 오래 머물지 못했던 모양이라고 풀었다. 만해는 학명의 호의를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만해의 양진암에 대한 각별한 정감을 이원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양진암(養眞庵)
「깊기도 깊은 별유천지라/고요하여 집도 없는 듯./꽃이 지는데 사람은 꿈속 같고/옛 종(鐘)을 석양이 비춘다」(深深別有地/寂寂若無家/花落人如夢/古鐘白日斜).
 
시 속의 계절은 늦 봄인듯 하다. 만해가 양진암에서 머문 계절은 어느 해 봄 한철이음은 다음 시에서 분명해진다.
  
양진암의 늦봄(養眞庵殘春)
「저녁비, 종소리에 봄을 또 보내느니/흰머리 다시 늘어 가슴 아파라./한 많고 일 많은 이 몸으로야/나머지 꽃 주인 노릇 어찌 해내리.」(暮雨寒鐘伴送春/不堪蒼髮又生新/吾生多恨亦多事/肯將殘花作主人).

한편 시인 서정주(1999)는 서너 살 때 백학명 선사를 처음 접한 기억을 짧은 시로 묘사한 적이 있다.

백학명 스님
「할머니는 (중략) 대여섯 살짜리 나를 업으며 걸리며/시오리(十五里) 산길을 걸어 닿던 초파일의 선운사./나는 거기서 늙은 할아버지 중 한 분을 보았는데/늙었으면서도 속눈썹이 계집애처럼 유난히도 길고/그 안의 두 맑은 눈망울은/ 내 마을 친구 중에서도 제일 친한 친구 같아서/곧 안심하고 따라다닐 수가 있었다./뒷날 알고 보니 이 이가 그 백학명 스님으로/만해도 하 답답하면 찾곤 했던 바로 그분이었다.」

 시인 미당이 대여섯 살이면 학명선사는 쉰 대여섯쯤 일 것이다. 어린 미당의 눈에 비친 학명은 '늙은' 할아버지였으나 속눈썹이 길어서 여자 아이 같았다. 맑은 눈망울이 마치 절친한 친구 같아서 금방 친근해졌다는 회고이다.

 학명 선사가 머문 양진암(養眞庵) '38선 남쪽의 한국 안에도 몇 군데 있지만 학명스님이 계시던 양진암이라면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청량산(淸凉山)에 있는 절로 보인다. 왜냐하면 학명 스님은 전북 정읍의 내장사를 비롯하여 주로 호남의 절간들에서 수도를 하고 지내시던 스님이니 말씀이다.'라고 미당은 적었다.

 미당의 해설을 빌면, '학명 스님의 속명은 백씨. 1867년에 나서 1929년까지 이 나라에 사셨던 스님으로 승명은 계종이고, 학명은 아호이다. 전남 영광 출생으로, 불경을 가르치는 스승이었으며, 선에도 깊고, 계율 지키기에도 청정하셨고 또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어서, 만해 스님도 많이 답답하면 백학명을 찾았던 모양이다'고 썼다.

 백학명은 몇 해 동안 중국, 일본의 이름난 절을 두루 찾아다녔다. 일본의 세계적인 선사 스스키 다이세스(鈴木大拙)의 제자와 법거량을 했다고도 한다. 아마 그 상대는 샤쿠소엔(釋宗演 ; 1859~1919)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선'(禪)을 'Zen'이라는 영문 표기로 세계화시킨 샤쿠소엔은 일본승려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었다.

 만암선사는 1908년 백양사 운문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 학명선사'를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깨달음의 기쁨을 즐겼다고 한다. 불가의 형님 벌인 학명을 업었으니 추앙의 반증이다. 만암선사는 1928년부터 동국대학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1947년에는 광주정광중고교를 설립하였다. '백양사에서는 대중공사 자랑 말라'는 말이 생기게 했고 선농일치(禪農一如)를 실천한 분이다.

 학명은 변산을 떠나 정읍 내장사를 중수하여 선실(禪室)을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40여 섬의 벼를 추수하는 등 반농반선(半農半禪)을 강조하였다. 무위도식하는 전통불교의 폐해를 혁파한 동시대 불교개혁자였다.

 만해 한용운은 학명의 이런 행적 이전의 어느 한 때 "왜 백척간두에 서서 한 발 나가지 않느냐"(佇立竿頭勢/不進一步何)고 했다. 백척간두에 서본 학명, 그것을 알아본 만해. 두 사람은 그러했다.

 이런 학명은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과 변산에서 서로 오갔으며 원불교의 대호법으로 서훈되었다. 학명이 월명암에서 떠난 어느 한 때 소태산은 24살 위인 학명과 다음과 같은 시를 주고받았다.

문 : 「천산(天山)을 꽤 뚫은 절정이여/바다로 갔으니 물결이 일도다/이 몸은 갈 길을 몰라/석두에 기댄 집을 짓도다」(透天山絶頂이여/歸海水成波로다/不覺回身路하여/石頭倚作家로다).

답 : 「절정은 천진의 빼어남이요/큰 바다도 천진의 물결이로다/이제 몸 돌릴 길 깨달았으니/(이름이)높이 들어날 석두가라」(絶頂天眞秀요/大海天眞波로다/復覺回身路하니 高露石頭家로다).

박 영 학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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