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은 용
(한국문화학과 교수)

13세 불문에 귀의… 왜장‘가토’ - 후원자
상인, 학덕을 겸비한  최고의 스승을 의미
니치엔상인 교화력, 민중을 초월해 초목까지

니치엔상인(日延上人)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5살인 1593년으로 알려져 있다. 묘안사 기록에는 그의 처음 이름을 대응(大應) 또는 태웅(太雄)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식 발음으로 「대왕(大王)」과 같은 「다이오」로 읽히니, 대왕이라는 의식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악세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선조에서 임해군, 다시 대응으로 이어지는 혈통은 장자상속법에 의하여 왕위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의 궁중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포로생활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신분은 자각하고 있었고, 그의 성장과 함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왕위계승의식도 엄습해 왔음직하다.

 

13세 불문에 귀의… 왜장‘가토’ - 후원자

상인, 학덕을 겸비한  최고의 스승을 의미

니치엔상인 교화력, 민중을 초월해 초목까지

 

전쟁은 끝났으나 환국의 길은 막히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과 일본의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광해군을 왕세자로 정한 조선왕조에서는 그의 송환노력을 기우리지 않는다. 그 사이에 도요토미(豊臣秀吉, 1536-1598)가 죽고 전쟁도 끝났지만 일본 국내는 도쿠가와(德川家康, 1542-1616)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전시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이 들어가던 상인은 드디어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수도승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출가위승(出家爲僧)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은 13세된 1601년의 일이다.
후쿠오카의 법성사(修昌山 法性寺)에서 득도하였으므로, 당시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를 데려간 왜장 가토(加藤淸正)는 철저한 법화종 신자로, 그의 세력권인 규슈지방에는 특히 법화종 세력이 강하며 이후 상인의 절대적인 후원자가 된다. 왕손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의식했을 것이며, 출가 후 상인이 수도와 학문에 전념하여 고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가토가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상인의 누이가 후쿠오카 번주(藩主) 구로다(黑田忠之)의 막하인물인 도가와(戶川)가로 시집간 것을 보면 이곳은 상인의 제2의 고향이 되어 있었다.
16세된 1604년, 상인은 수도인 교토(京都)에 입성한다. 그곳의 본국사(本國寺)에 마련된 구법단림(求法檀林)에 수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 해인 1603년에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가 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현재의 도쿄(東京)에 에도(江戶)막부를 개설하고, 이 해에 양국의 선린강화가 이루어졌으니, 드디어 난세가 끝난 상황이다. 당시 수많은 포로가 귀환했으므로 조선왕실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했더라면 그도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이미 불문에 귀의하여 잊혀진 인물이 되어 있었다.
당시 같이 수학한 동포 니치요(日遙)와도 만났고, 그곳을 지나가는 대규모의 고국파견의 사절단, 즉 조선통신사 일행도 마주쳤을 것이다. 그가 환영하지도 않는 고국에 연민을 가지고 만년까지 조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정신세계가 그 가운데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상인은 구법단림에서 3년간 불교교리의 기초를 닦는다. 『법화경』을 비롯하여 교학연구나 수행에 있어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이어서 19세된 1607년부터 고급과정인 지바(千葉)현의 반고사(飯高寺)에 위치한 반고단림으로 진학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수년간의 고급과정은 젊은 그를 법화종의 인물로 성장시키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선조가 붕어(1608)하고, 그의 숙부인 광해군이 등극하며, 부친인 임해군이 의문의 죽음(1609)을 맞이한다. 35세의 나이였다. 장자상속을 전제로 하는 왕위계승 관행과 관련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이이첨 등의 대북파가 작용하여 강화로 유배시킨 다음 몰래 살해한 것이다. 강화현감 이직이 죽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권력을 손에 쥔 그들이었기에 마침내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이러한 임해군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선조의 정빈 홍씨에게서 난 경창군의 아들 양녕군을 양자로 잇는다. 상인에게 있어서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사정이 일본의 수행도량까지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발군의 실력자로 인정받은 그는 가간원(可觀院)이라는 당호와 함께 상인(上人) 칭호를 받는다. 학덕을 겸한 최고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출가와 수학, 그리고 출중한 교화력
상인의 대단한 교화력은 교계(敎界)를 주목시킨다. 그에게 법화종 최고의 도량인 지바(千葉)현 고미나토(小溱) 탄생사의 주지임사가 맡겨진 것이다. 26세된 1614년의 일이다. 탄생사(誕生寺)란 법화종의 종조인 니치렌성인(日蓮聖人, 1222-1282)의 탄생지에 건립된 사찰로, 상인은 종조로부터 18세 법주를 계승하고 있다. 이곳에 조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불사(佛事)를 행하는데, 당시에 후쿠오카에 용잠사(龍潛寺)를 창건하고 있으므로 누이가 살고 있던 그곳을 왕래했던 모양이다.
법화종에서는 「남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제목(題目)을 외운다. 염불(念佛)이 아니라 염경(念經)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사는 중생이 구제받는 길은 『묘법연화경』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고, 그 무궁무진한 진리는 오히려 경전의 제목을 외어 의지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가르친다. 종조 니치렌성인은 「제목」을 중앙에 내려적고 사면에 사천왕을 배열하는 등의 만다라(蔓茶羅) 족자를 본존(本尊)으로 제작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상인의 존호를 받은 고승들은 각각 본존만다라를 제작하고 있는데, 탄생사에는 상인의 작품이 현존하므로 18세 법주당대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도쿄시내 시나가와(品川)지역에는 상인이 창건한 두 사찰이 현존한다. 각림사(最正山 覺林寺)와 원진사(圓眞寺)가 그것이다. 수백미터 떨어져 있는 이들 사찰은 암자격인 원진사에 비하여 각림사는 규모가 크다. 특히 「세이쇼코(淸正公) 신앙처」로 자리잡고 있는데, 상인을 후원했던 가토가 죽은 후 제사를 지내며 명복을 빌었던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승되는 현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상인의 성정(性情)을 드러내는 각림사의 창건설화이다. 화초를 좋아하던 그에게 막부(幕府)는 넓은 터를 제공하여 화초를 가꾸게 했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절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의 교화력이 민중을 넘어서서 초목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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