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비일상적 정황으로서의 행복과 불행

  행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
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과 불행사이의 어정뜬 상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보통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것은 비일상적인 것의 현
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불행한 것이고 불행하지 않으려면 행복해야 한다는 이분법은 비일상적인 상황에서만 등장합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극단적인 대립을 겪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행복과 불행이 별로 문제되지 않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일상의 균열이 낳은 특수한 사태의 소산입니다.
 불행에 빠진 자는 지금 그를 지독하게 불행하게 만드는 현실만 제거된다면 행복할 것처럼 느낍니다. 그에게
는 불행의 끝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지독한 불행이라는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이 아닙니다.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자는 이 행복이 혹시라도 깨질까봐 조마조마합니다. 그는 이 행복의 시간이 깨지는 순간자기가 영원한 지옥에 갇힐 거라고 믿습니다. 그에게는 행복의 끝에 불행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으면 곧 불행해질 것이라는 의식은 행복의 비일상성을 맛본 자의 고백일 뿐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은 이러한 행복/불행의 이분법으로 압축되지 않습니다.
 요약하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대립을 겪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일상적인 정황 속에서
우리는 행복 아니면 불행 이라는 이분법적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항상 그렇듯이 이분법은 삶의 일상적인 정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이야기하지만 선악의 대립은 가공된 이야기 속에만 존재합니다. 혹은 선악이란 극단적이거나 극한적인 삶의 정황에서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건이나 사물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악의 대립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종교의 논리는 일상적인 현실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비일상성이 현실 속에 침투할 때만 발언되는 삶의 극화현상 입니다. 이야기로 가공된 현실만이 선악의 대립을
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입니다.
 종교는 맥없이 느슨한 세계가 아니라 팽팽하게 긴장된 세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물론 느슨한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는 동화나 소설이나 신화의 팽팽한 긴장의 세계가 공포의 대상이거나 오락과 흥미의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법은 일상적인 삶의 논리가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문제

 저는 행복/불행의 이분법이 비일상적인 맥락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도식으로 삶을 재단하는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며, 이러한 도식 속에서 우리는 항상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굳이 행복해지려 한다 할지라도 이때 우리는 무척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외적 불행,
혹은 객관적인 불행은 극심한 내면의 침잠 없이는 행복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칫 내면의 행복
추구는 외면의 불행을 억제하고 중화시키기 위한 허구적 기술이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행복 담론은 밖을 추구하는 정신을 안으로 향하도록 꺾어버리는 기술입니다. 안으로 안
으로 침잠하는 정신은 개별성을 지우고 인간을 지우고 시간을 지우고 정체성을 지우면서 자기를 자기 아닌 다른 것으로 변환시킵니다. 갑자기 부서지는 의자를 향해서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런데 세계는 부서지는 의자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향해서 화를 내지만, 세계는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세계가 인격체라도 되는 양 세계를 향해 분노의 감정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계는 실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환영의 세계일 뿐입니다.
 대략 짐작하셨을 줄 압니다만, 저는 행복과 불행이 다분히 종교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언어를 구사하는 순간 우리는 종교적인 세계 속으로 내던져지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만
행복과 불행의 어휘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서서히 종교적인 세계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오늘날 행복은 종교적인 담론이 아니라 세속적인 담론의 중요 주제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종교를 통해 행복에 도달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 밖에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종교 밖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종교 밖에 존재하는 지극히 종교적인 상황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이것을 종교 밖의 종교 의 등장이라고말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선과 악, 혹은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세속적인 맥락에서 재서술하고 있을 뿐, 문제 자체는 여전히 종교적인 것이고 그 해결책도 대부분 종교적인 것입니다.
 저는 행복이란 그저 살다가 어느 순간 우리가 발설하게 되는 감탄사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행
복하다!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상태에 대해서 행복하다 라고 이름
붙입니다. 행복은 마치 그것 이라는 지시대명사와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빈 말 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정의할 수 없는,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없는, 그래서 저장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고, 계획할 수도 없고, 또한 가르칠 수도 없고, 학습할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은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발언되는 '나의 증언' 입니다.

행복의 의미=불행의 구원론

 저는 행복이 근대적인 문제이자 물음 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복을 추구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행복의 단위 이고 사회는 복지의 단위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복과 복지가 비례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고 복지는 집단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과 복지는 많은 경우에 서로
어긋나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행복이란 무욕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해봤자, 그리 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순한 경제학적 지식만으로도 우리는 한 사회가 지닌 재화의 양이 일정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경제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갑부가 될 수는 없는 시스템입니다. 한 사람이 잘산다면 다른 사람이 못살 수밖에 없고, 지금 내가 잘산다면 미래의 누군가가 못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행복은 집단의 복지와는 다른 별개의 논리 속에서 벌어지는 사태입니다.
 사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에게 행복이란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복 (五福)이란 말이 가
리키듯이 장수하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덕망이 있고 급사하지 않는 것은 모두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측정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복이란 인간의 내면의 상태가 아니라, 어느 정도 명확히 관찰할 수 있는 외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행복은 다분히 심리학적 현상 입니다. 우리는 행복이 내적으로 경험되는 충만한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대사회 이후에 팽배해진 이러한 행복의 내면화 현상 내지는 심리학
화 현상 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주관적인 심리적 상태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행복이 보이는 것 이었지만, 이제 행복은 보이지 않는것 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행복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꿈이거나 과거에 지나가버려 이제는 사라진 추억 같
은 것입니다. 이때 현재는 항상 불행의 장소가 됩니다. 행복은 항상 과거 아니면 미래에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복이 이제는 오기를, 아니면 다시 오기를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행복은 메시아와도 같은 구원의 피난처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오늘날의 행복 담론은 종교가 지닌 숱한 유토피아 담론의 미니어처인 것 같습니다. 유토피아는 공동체의, 혹은 우주 전체의 구원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유토피아를 혼자 힘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렵고 외로운 싸움 입니다. 왜냐하면 행복 추구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행복하자마자 불행의 덫에 걸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것 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
로 불행의 극복이야말로 행복 담론의 일차적인 과제인것 같습니다. 불행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불행은 구제의 대상입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행을 더 이상 불행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바로 불행의 구원론이자 행복의 의미론일 것 같습니다.
 

 

  이창익 교수(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필자소개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 한신대학교 학술원 연구교수 역임.
- 현재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 주요 저서: 신화로 그리는 마음의 지도 , 종교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마음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시론 , 신 관념의 인지적 구조: 마음 읽기의 한계선 등의 논문과 저서 종교와 스포츠 , 불확실한 세상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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