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청(淸) 을 알고 싶다
『열하일기』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중국 여행기이다. 1780년, 청(淸)나라 건륭(乾隆) 황제(1711~1799)의 칠십 수(壽)를 축하하기 위한 조선의 외교사절단에 끼어, 연암은 청나라를 보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연암은 오래 전부터 '청' 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연암은 조선 사람들이 오랑캐라 업신여기는 나라인 청 에가서, 오랑캐가 다스리는 야만의 시대에 중화 문명의 행방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에게 중국은 조선이 현실에서 꽃피우려했던 공자(孔子), 주자(朱子)의 이념이 기원한 공간이자 이 이념을 바탕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이룩한 문명의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과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의 여행기를 읽고, 머릿속으로 중국을 상상하며 흠모했다.
 하지만 명(明)나라가 망하고 '청' 이 세워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청' 은 변방의 오랑캐인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나라였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 에 외교사절로 가면서도, '청' 을 인정하지 않고 깔보았으며, 그래서 '청' 의 번영을 무시하거나 폄하했다. 중화의 문명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를 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소중화(小中華) 사상' 과 '청' 을 물리쳐 중화 세계를 재건해야 한다는 '북벌(北伐) 의식' 에 사로잡혀, '청' 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연암은 자신이 직접 '청' 으로 가 오랑캐가 세운 나라에서 중화 문명의 행방을 찾고 천하(天下)의 대세를 엿보고자 한 것이었다.

 똥거름과 기와조각

 연암의 여행은 압록강에서 시작된다. 압록강을 건너, '청' 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관문인 책문(柵門)에 들어서는 그 순간, 연암은 외딴 변경의 작은 마을을 보고는 질투와 시기의 감정을 토로한다. 연암에게 질투와 시기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옥과 도로, 수레와 기물 등이다. 이 변경의 작은 마을조차 조선 보다 월등히 발달한 청 의 문물! 연암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낙후된 삶을 살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떠올리며, '청' 의 문물, 그 문명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연암은, 책문 밖 작은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여행 기간 내내 청 의 문명과 그 번영을 주시한다. 연암이 주시해 찬탄한 것은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특히 여러 차례언급하고 있는 것은 '벽돌' 과 '수레' 이다. '벽돌' 과 '수레' 는 경제적 실용주의와 중상주의의 표상인 바, 연암은 이 표상을 내세워 '이용후생(利用厚生)' 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연암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깨진 기와 조각' 과 '냄새 나는 똥거름' 을 예로 들어 말하기도 했다. 연암이 '청' 을 다녀온 조선의 선비들 에게 '청의 장관(壯觀)' 이 무엇인지를 묻자,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 땅이 오랑캐에게 더럽혀져서 야만의 문물을 따르게 되었으니, 볼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냐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암은 단언한다. 청 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 과 '냄새 나는 똥거름' 이라고.
 연암이 중국의 장관이라 한 깨진 기와 조각 과 똥거름 은 쓸모없다고 여겨 버려지는 참으로 하찮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 하찮은 것을 잘 이용하면 백성들의 삶이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것이 아닌가? 똥거름과 기와 조각은 하찮은 것이지만 이 하찮은 것이 바로 식(食)과 주(住)의 바탕을 이루어 '청' 의 융성을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와 조각'과 '똥거름'은 조선보다 발달한 청 의 문명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선의 선비로 자부하는 사람들은 청 이 오랑캐의 나라라 해서 그들의 융성을 외면하고 그들의 문물을 야만이라 매도했지만, 연암은 그들이 외면하고 매도한 그것 이 바로 문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매도한 것을 연암은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었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연암은 그 사람들과는 '다른 눈[안목]'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의 눈은 그 사람들의 눈과는 달리,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는 눈이며, 가치 있는 것을 그 가치 그대로 보는 눈이다. 연암이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가치 있는 것을 그 가치대로 보는 눈을 가졌다면, 연암은 '도안(道眼)' 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강물과 언덕의 중간 경계에 있는 것이 '도(道)' 라고 말한 바 있다. 도 는 경계를 가르는 강 과 언덕 의 이쪽 과 저쪽 , 어느 한쪽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가르는 그 곳 에 존재하며, 그곳 은 이쪽 과 저쪽 이 서로 만나는 곳 이다. 그러므로 강 과 언덕 으로 구분되어진
수많은 경계의 이쪽 과 저쪽 이 만나는 바로 그곳 에 자리 잡았을 때, 이쪽 과 저쪽 에 매이지 않고 천하
인민의 떳떳한 윤리와 사물의 법칙 인 '도(道을)' 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연암이 도안 을 지녔던 것은 이쪽과 저쪽 에 매이지 않고 '이쪽' 과 '저쪽' 이 만나는 '그곳' 에 자리 잡고 바라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제47회 세계고전강좌에서 열강하는 김현양 교수

 판첸라마와의 만남

 1780년의 이 외교사절단은 조선 최초로 열하(熱河)를 가게 되었다. 물론 이는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황제가 열하로 오라고 하자, 사절단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곳에 이르게 된다. 그러고는 청 의 건륭 황제와 '티베트'의 라마교 법왕(法王)인 판첸라마를 만나게 된다.
 연암은 건륭 황제와 판첸라마가 만나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건륭 황제와 만나 포옹을 하고 무릎을 맞대고 담소를 나누는 판첸라마! 건륭황제는 판첸라마를 위해 열하에 티베트의 포탈라궁(布達拉宮)을 본떠 화려하고 웅장하게 찰십륜포(札什倫布) [위대한 승녀가 사는 곳]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판첸라마에 대한 건륭 황제의 이 극진한 예우에 연암은 당혹했다. 판첸라마는 하찮은 오랑캐의 법왕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연암은 왜 이런 일이 가능했던가를 간파한다. 판첸라마에 대한 예우는 곧 그가 통치하는 티베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판첸라마에 대한 이 과도한 예우는 티베트를 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건륭 황제가 열하를 번성케 하고 이에 자주 내왕하는 것도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을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청 이 이토록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는 것은 청 이 지닌 군사력뿐만 아니라 티베트 등 이민족을 회유하면서 적절히 견제한 결과가 아닌가!
 연암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청 은 대제국을 건설한 대국 이며 그렇기에 스스로를 중심으로 여기며 변방의 이민족을 하찮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하찮은 변방의 법왕이 세계의 중심인 중국의 황제와 대등하게 담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조선은? 작고 낙후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청' 과 '티베트' 를 깔보고 얕보고 있는 조선의 미래는? 연암은, 문명[중화(中華)]과 야만[오랑캐(夷狄)]을 차별하는 논리에 사로잡혀, 화이(華夷)의 분별이 사라져 가는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도외시 하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중화주의(中華主義)로부터 더욱 힘차게. 더욱 멀리 탈주해 나갔을 것이다.

 도(道)란 그곳 에 있다

 연암은 '청' 에서 중화주의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열하일기』에서 이를 말하고 있는 것은, 북벌론과 주자학이라는 관념에 갇혀 실(實) 을 추구하지 못하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가능한 것은 연암이 이곳 과 저곳 의 눈이 아닌, 경계인 그곳 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아쉬움도 없지않다. 연암은 묘향산(妙香山)을 태산(泰山)에 비하면서 겨우 자그마한 둔덕에 지나지 않는다 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조선의 선비가 태산 을 높은 뫼 의 상징처럼 언급한 시조도 있거니와, 조선 사람들은 태산 을 중국의 영산(靈山)이며 거산(巨山)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 통념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 사람들에게 태산이 그리 높지 않으며, 심지어 묘향산보다도 낮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아마 이를 믿으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암도 여전히 그런 통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주를 생각하며, 지구와 달을 상대화하는 시각을 지니고 있어도, 통념에서 빠져나와 진리 로 숭앙되고 있는 것을 발본적으로 회의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연암은 『열하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진리는 '이곳' 과 '저곳' 이 아닌, '이곳' 과 '저곳' 이 만나는 '그곳' 에 있다고.
                                                                                               김현양 교수(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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