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김사은 동문은 1987년 본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원광대신문사 학생기자로 활동했고, 졸업 후 지방 일간지 기자와 방송구성작가로 일하며 대학에도 출강했다. 현재 원음방송 편성제작국 PD로 재직 중. 2000년 한국문예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 대학신문사 23기 동기 강인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사에서 1박2일로 MT를 왔다며 최명희 혼불 문학관에 다녀가는 길이라 했다.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에 있는 혼불 문학관과 전주는 자동차로 50여 분 거리. "잠깐 나올 수 있으면 전주에서 저녁이라도 먹자"고 했더니, 3백여 명의 직원이 함께 한 대규모 행사여서 개인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는 광한루에 도착했다며 전화가 왔고, 저녁 무렵에는 숙소로 들어간다고 전화가 왔다. 새벽까지 토론회를 하고 지리산 노고단 등반 일정이 계획돼 있다는 세밀한 보고와 함께….

 모처럼 시골에 내려와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걸리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춘향골 남원에서 이틀을 보낸다 하니 고향이 남원인 지인들이 떠올랐겠지. 남원 출신으로 26기 국문과 출신 김현주도 있지만, 동기인 내가 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막걸리 한잔하며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라며 내내 아쉬워하는 그 못지 않게 나도 섭섭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집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더 많다. 대학생활 4년을 돌이켜보니, 어쩌면 학과 친구들보다 대학신문사 동기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 가운데 강인선과 그의 아내 백명숙은 든든한 동기이자 동료였다. 10년 지기도 아니고 20년 지기인 것이다.

 1983년 3월, 입학식을 마친 후 대학신문사를 찾아갔다. 선배들은 사뭇 친절하게 이것저것 입사 절차와 대학신문기자로서의 보람, 긍지 등을 설명하며 유혹(?)했고 나는 입사 시험이라는 절차를 치르고 기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뽑힌 23기 수습 기자들이 신문방송학과의 나와 유선희, 한문교육과의 백명숙, 교육학과 곽성기, 국문과의 강인선, 건축공학과 이용인, 사회과학대학 소속으로 기억되는 김정한이 있었고 후에 신문방송학과의 김미숙과 응용미술학과의 원석재가 합류했다.

 대학 신문사 합격의 기쁨도 잠시, '단결심을 통해 동지애를 기르고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확립하며 대학신문기자로서 자긍심 고양과 진취적 기상을 진작하기 위해'라는 명분아래 지옥 훈련이 실시되었으니, 토요일 오후 영문도 모르고 불려 나간 우리들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대운동장을 열 바퀴쯤 돌고 노래 한 곡씩을 부른 후 누군가의 고린내 나는 신발에 부어진 막걸리를 들이켜야 비로소 기자로서 자격이 주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는데 내가 쓰러질 때 마다 나를 일으켜주고 격려해준 사람이 백명숙과 강인선이었다.

 당시 몽둥이를 들고 눈알을 부라리며 호령하던 22기는 김종렬, 김한진, 최병천, 류민자, 봉은희, 조현정 선배였으며 편집장이던 21기 정대섭 선배와 부편집장 유재흥 선배는 치밀한 계획아래 수습기자들을 불러 삼겹살 파티를 열며 위로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몽둥이는 소도구에 불과했고 선배들은 모두 종이 호랑이였다. 선배 한 사람 한 사람이 어찌나 정이 많은지 후배를 살피는 마음이 그렇게 살뜰할 수가 없었다(얼마나 살뜰했으면 22기 김종렬 선배와 23기 유선희는 결혼해서 지금도 알콩 달콩 살뜰하게 잘 살고 있다).

 동료 가운데 백명숙과 나는 특히 마음이 잘 통해서 진로 문제나 학교 생활의 어려움 등을 털어놓으며 서로 많이 의지했다. 어느 날은 예쁜 꽃 한 송이와 함께 "사은아, 피곤하지? 힘내!"라는 쪽지를 남기기도 했고, 낙엽을 책상 속에 넣어두기도 했다.

 그렇게 돈독하던 우리 동기들이 집안 사정과 학업, 진로 문제 등 이런 저런 사연을 거쳐 몇 사람이 신문사를 그만 둘 때마다 안타깝고 허탈해서 대단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실 앞에 굽힘없고 역사 앞에 부끄럼 없다


  대학생활의 전부였던 '원광대신문'

 수업을 받으면서 틈틈이 취재하고 기사쓰고 편집에 배달까지 대학신문기자의 역할은 1인 5역 이상이었다. 수업을 빼먹어도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이 대학신문의 사명이었다. '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 신문사를 다녔다'는 선배들의 회고는 신문에 대한 애정을 잘 표현한 것이다.

 뜻이 있어도 시간이 없거나, 군대를 가거나, 부모의 반대로 부득불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신문 발행을 앞두고 편집을 할 때면 꼬박 날을 새는 경우가 많았으니 아무리 성년이라 해도 부모들의 입장에서 '날 새고 신문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1학년이 끝날 즈음 강인선과 나, 김미숙, 컷 기자 원석재가 신문사를 지켰고 군대간다고 휴학한 22기 김한진 선배가 군대를 면제받아 복학해서 1984년에는 우리와 함께 22.5기로 든든한 동지애를 발휘했다.

 그 해 도서관 옆 건물에서 지금의 학생회관 2층으로 신문사가 이전했고 지금까지 대학 문화 창달의 기수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당시 독문과의 강병선(문학동네 발행인) 선배를 비롯, 국문과의 안도현(시인), 원재훈(시인), 이진영(시인) 학생 등이 신문사를 드나들며 열심히 시를 쓰고 기고를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편집인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당시 몇 푼 안되는 푼돈이지만 그들에게 지급된 원고료가 많은 문학 지망생의 심신을 살찌우는 보약이 되고 근처 주점과 나아가 익산시 경제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으리라.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매 전공 수업보다는 학생회관 2층 대학신문사에서 보낸 세월이 더욱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3학년 2학기까지, 거의 대학생활 전부를 바친 대학신문사 동기들은 어쩌면 형제인 동기(同氣)보다 더 찐한 동기(同期)애로 뭉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20여 년전, 대운동장을 달리다 기자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었을 때, 밤 늦은 편집이 힘들어 신문사를 그만두고 싶었을 때, 전공과 대학신문 활동 가운데 고민하며 방황할 때, 그때 나를 일으켜주고 지켜주고 용기를 준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오늘 따라 동기들이 많이 그립다. 오늘같이 가을 햇살이 좋은 날, 학생회관 앞 잔디에서 막걸리 한 잔 하면 좋겠다.

김 사 은 (원음방송 PD/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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