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알았으나 깊은 물에 밀려가고 물 속으로 잠기고 안개가 거두어 갔다 - 「한진여」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는지 마음이 옹졸해졌다.

 크나큰 일을 치러낸 것도 아닌데 시원섭섭한 심정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 맨송맨송한 그리움이 눈에 밟히기도 하고 딱히 정해지지도 않은 상처 역시 살비듬 날린다.

 제대로 된 잠을 늘어지게 자고 싶지만 가을바람이 담담한 나를 건드린다. 무턱대고 밖에 나가 익숙한 골목을 걷고 낯익은 거리를 쏘다니는 것이 전부이다. 듣도 보도 못해 나와 무관한 세월의 세계는 어김없이 온몸을 다해 나를 등 떠밀어 보낸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 「오래 된 정원」 지도 없이 가슴에 새긴 길은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끼니와 끼니를 어긋나서 밥이 밥을 먹기도 한다. 혼자 비켜설 수 없을 때 혼자 수저를 든다.

 막잔의 소주를 털어 넣듯 멍청해진 마음을 담아 퍼주고 싶기도 했었다. 한 때의 그리움도 닳고 닳아 강의실 책상에 빼곡히 들어 찬 글씨 역시 빛이 바랬다.

 어머니, "얘야, 네 사랑이 힘에 겨웁구나" / "예 어머니, 자루가 너무 큰 걸요" -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마음이 잘못 오고 갔는지 도무지 추스를 길이 없겠다. 갈 데라곤 손바닥만큼 조금 더 보태진 골방뿐이다.

 무심코 가슴 닿는 데마다 짓무른 홍시가 터졌다. 끔직하지 않게 생각이 드는 까닭은 차에 치여 쓰러진 사람을 선뜻 일으켜 줄 수 있을까 해서다. 내가 이미 멀쩡히 일어나 서서 갈 때, 너무 침묵에 앞서 있을 때 불어터진 울음도 입을 다물 것이다. 가을 타작이 끝나고 소 줄 짚을 묶으러 가는 사랑하는 저이들처럼 나도 징검다리를 낸 가슴에 걸음을 옮긴다.

 손은 어디고 손가락은 어디인가 / 별은 어디고 내 눈은 어디인가 - 「저녁의 우울」 내 품이었는지 내 뒤란이었는지 그리움은 살며시 익을 듯 말 듯 곳곳에 걸려있다. 한 눈 파는 사이에 찬 이슬 맞고 감기에 걸리는 것은 아닐런지. 메아리가 되돌아오기 전에 먼저 등을 돌렸다. 알든 말든 상관 않고 모르는 척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그럭저럭 보내는 것이리라.

 내 심장이 뛰는 것 또한 바람의 한 / 사소한 일이었으니 - 「어지러운 발자취」 머리가 나쁘면 심장이라도 단순해야 하는데 너무 환한 방을 내어 가졌다. 지난 약속도 무색해지고 다 지난 일 삼아 속절없는 가슴을 다른 가슴으로 지워낸다.

 찬바람 불기 전에 방해받지 않고 훼방을 놓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을 놓아야겠다. 그리울 리 만무한 일에 치이기엔 내 속울음의 연못이 벌써 동이 났다.

천 명 구 (고고미술사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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