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러한 화인 아트(fine-art)로써의 예술은, 공예라는 뜻의 예술(art)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술이라는 말은 테크네(techne)에서 왔다.

 고대 희랍사람들이 생각했던 예술/techne이란, 첫째로 자연으로부터 얻어진 재료(meterial)를 가지고 둘째,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솜씨(혹은 지식<knowledge 즉 skill>)를, 셋째 어떤 작업장(Labor)에서 행위 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이 예술(art)이라는 말은 테크네에서 그 의미가 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단어가 시대를 건너오면서 글자만 변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정의는 적어도 18세기가 시작 될 때까지는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690년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존 로크가 자신의 오성론(悟性論)에서 취미 판단(Geschmack urteil, taste)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전격적으로 변환기를 맞는다.

 이 취미판단이라는 것은, 과거 희랍시대 때부터 전해 오던 아름다움(美)에 대한 개념을 일거에 뒤엎어 버린다. 이는 대상을 보고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근거를, 대상이 이미 가진 아름다움의 조건에 두지 않고, 인간이 가진 미를 판단하는 기준인 이 취미판단(取美判斷)에 두었다.

 즉, 무엇을 본 후 내면(마음)의 취미판단 근거가 나를 기쁘게 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주관적인 미의 기준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과거 테크네를 통해 공예적인 솜씨를 예술의 가장 드높은 목적으로 알던 장인들에게는 그 솜씨가 누구에게나 인정될 기준이 필요했다.

 아름다운 어떤 것을 결정하고, 그 결정된 사실을 마치 신이 빚어놓은 것처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그러했던 것이다. 모든 만물이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 '결정론적 사유'에 매몰되어 있던 시기였기에 그러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유클리트의 공리라든지 혹은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은 단지 수학적인 어떤 난제를 풀기위한 숫자로써 만이 아니라, 동시에 미를 규정하는 철학이자, 그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황금분할(golden section)이라는 개념 역시도 당시의 산물이다. 희랍사람들은 이처럼 아름다움을 비례(propotion)나 하모니(concert harmonique) 혹은 좌우대칭(symmetria)등에서 찾았기에 그 수(數)로써 규정된 비례가 곧 아름다움의 기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근거를, 그 대상이 이미 아름다움에 대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비례나 하모니 등으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취미판단에 의해 주관적으로 미를 규정하던 근대 미학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의 개념 중에는 창의성이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것처럼 미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던 과거에는 어떤 예술의 분야든지 그 안에 작가의 창의적인 내용을 담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작품을 주문한 패트론(patron, 보호자, 혹은 작품 주문자)의 요구에 맞추어 그가 정한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작가가 하는 일이란 자신이 가진 기술적인 솜씨를 눈부시게 발휘하는 것 밖에 없었다.

 우리가 지금도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는 마을 앞에 붙이는 전치사고,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라는 뜻)의 그림도 그가 당시로써는 도저히 인간의 솜씨라 하기 어려울 만큼 사실에 근접된 재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 밖에는 전혀 자신의 그림 안에 창의적인 내용이나 생각을 임으로 삽입하지 못했다.

 겨우 스푸마토(sfumato)라고 하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구사하는 방식정도만 창의적일 뿐이다. 즉 기술적인 창의성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그린 리자 부인(앞에 붙는 모나는 경칭일 뿐이다. 미스(miss) 혹은 미세스 정도의 의미를 가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똑같이 그렸을 뿐이다. 곰브리치는 이 그림에 대한 찬사로 무엇인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그림이라 했지만 사실은 어떠한 그림을 보고라도 상상은 늘 가능하다. 상상이 그 그림에 적합 하냐 혹은 그렇지 못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계속)

정 주 하 (사진가 /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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