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날이 빨라지고 있는 새로운 변화와 홍수처럼 밀려드는 수많은 정보들은 우리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새로운 변화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또다시 변화하는 사회의 격변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기에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미신적 주술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역』은 본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대의 중국인들이 창안한 점(占)의 방식에 의해 형성된 점서(占書)다. 『주역』의 대표적 점사(占辭)인 길흉회린(吉凶悔吝)도 사실 불안한 인간 존재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강(剛)과 유(柔)가 서로 밀쳐 변화를 낳게 된다."고 설명하면서 이 음유양강(陰柔陽剛)의 상호 추동(推動)에 의한 천지만물의 지속적인 변화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 『주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낳고 낳는 것을 일러 역(易)"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낳고 낳음(生生)'이란 지속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잠시 그러한 모습을 잠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변해야 할 과정적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 역시 근본적으로는 천지만물의 일원으로 만물과 더불어 천지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함께 동류하는 과정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천지와 더불어 변화하는 과정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에 천지의 지속적인 변화의 격랑 속에서 주어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전개한다. 변화에는 항상 변화에 대처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스럽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럽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을 일러 성대한 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충동이나 자연환경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필연성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자연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나아가 그것을 조정할 줄 아는 자기 창조적 존재다. 『주역』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우연적이며 필연적인 인간 존재의 본상을 깨닫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의 변화를 미리 살펴 천도에 의거하여 대처하도록 함으로써 위험한 국면에서도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도 물질로 구성된 육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물리적 자연 질서의 일부이며, 또한 일정한 물질적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인간 역시 자연의 질서 안에서 자연의 법칙을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자율성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생명의 탄생은 각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던져진 자연의 우연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 또한 한정된 공간에서 자연의 질서를 따라 일정기간 영위되다가 끝내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우주변화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명은 자연의 물리적 우연성과 필연성을 그 본질로서 내포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탄생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죽음에로 향하는 유한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역』에서 건원(乾元)은 대생지덕(大生之德)으로서, 일종의 창조적 생명정신이 우주의 일체에 관통하는 것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고, 곤원(坤元)은 광생지덕(廣生之德)으로, 일체 생명의 활동을 받쳐주고 길러주는, 지상의 생명 충동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건원 곤원은 우주에 광대하게 갖추어진 창조적 생명 정신인 것이다. 이러한 『주역』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 역시 만물과 더불어 천지음양의 화합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우연적 산물이며, 인간의 인간다움인 인간의 성명 역시 건도(乾道)변화 중에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필연적 산물이다.
 또한 『주역』에서는 "일음(一陰) 일양(一陽) 하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고 말한다. 이를 계속하는 것은 선(善)이요, 이를 이루는 것은 성(性)이며, 음양변화를 알 수 없음을 일컬어 신(神)"이라고 말한다. 일음일양의 변화는 천지만물을 생성하여 변하게 하는 우주의 생명력이기에 가치의 측면에서는 선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이 일음일양의 변화를 그 본질적 속성으로 갖는다. 『주역』에서 천지와 인간은 각기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천지음양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활동 역시 거대한 우주 변화의 흐름(大化流行)에 동류하면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역』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성명과 생명의 형성은 우리의 인식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음양의 신묘한 작용과정에서 이루어진 우연적 산물이자 필연적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우주의 모든 다른 부분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고통도 천지자연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미국의 철학자인 로티(R. Rorty)는 인간이란 보편적인 본질을 특권적으로 부여받은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인 것들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따라서 피안의 가치를 좇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며, 자신의 운명적인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로티의 이러한 언급은 자기 창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말이다. 
 『주역』에서는 인간이 천지와 더불어 만물 경영의 주체가 됨을 강조한다. 그래서 "옛날 성인이 『역』을 지어 이를 통해 (하늘이 부여한) 성명(性命)의 도리에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음양으로 하늘의 도를 세우고, 유강(柔剛)으로 땅의 도를 세우고, 인의(仁義)로 인간의 도를 세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 인간이 건도변화 가운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명에 내재된 인의의 도를 좇아 음양의 하늘과 강유의 땅과 함께 만물화육에 동참함으로써 우주경영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주역』에서는 "이루어진 성(性)을 보존하고 또 보전함이 도의(道義)에 이르는 문"이라고 하였고, 또한 "도(道)와 덕(德)에 화합하고 순응하며, 의(義)에 합당하게 행하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의 본성을 다하여 천명(天命)에 이른다."고 하였다. '본성을 다하여 천명에 이르게 된' 사람의 성(性)은 건원(乾元)이 만물을 생성하는 과정의 도와 합치되는 것으로, 이때의 인성(人性)은 곧 천도의 세계가 된다. 여기에서 천도와 인성은 일체가 된다. 인성과 천도가 하나 될 때의 인간은 이미 하늘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이다. 하늘의 경지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와 '성덕대업(盛德大業)'을 성취하는 자가 바로 '대인(大人)'이다. 『주역』에서는 '대인'을 "천지와 같은 덕을 가지고, 일월과 같은 밝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인'은 육체로부터 솟구치는 욕념의 소아(小我) 세계를 뛰어넘어 덕성 상으로는 이미 하늘의 덕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이 대인이야말로 창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물리적 우연성과 필연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창조를 성취한 자아실현의 극치인 것이다.
 과학기술에의 맹신과 물질만능주의는 우리의 삶의 바탕을 이루는 자연환경을 도구와 수단으로 인식하고, 인간의 생명현상까지도 물질적 현상으로 환원해서 봄으로써 인명경시의 풍조가 만연하게 되고, 자연환경의 심각한 오염은 물론 생태계의 파괴, 자원의 고갈 등의 환경위기를 불러오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며,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 존재'다. 이론적으로는 나의 '독존'이 가능할지 모르나 우리의 실존은 '너' 없이 '나'가 설 수 없는 공존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따라서 '나'의 자아실현은 '나'의 삶의 무대가 되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나'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자연'도 '사회'도 건강해야 한다. 더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로 변모하고 있는 오늘에 있어 이러한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민족이나 한 국가에 한하는 일이 아니다.
 『주역』에서는 '생(生)'을 우주의 근본적 본질로 간주하며, 이를 매우 중시한다. 그러기에 "천지의 가장 큰 덕을 일러 생"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주를 하나의 커다란 유기적 생명체로 바라보고,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와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계와 인간세계를 하나로 융합하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이해는 자연을 도구적 대상이나 수단으로 이해함으로써 환경위기를 자초한 근대 이후의 자연이해에 대한 사고의 전환에 참고할만한 자연인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주역』의 본래적 기능은 점복(占卜)에 있으며, 그 궁극적 목적도 '하늘의 도(天道)를 미루어 사람의 일(人事)을 밝힘(推天道以明人事)'에 있는 것이라며 아직도 『주역』을 인간의 운명이나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도구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주역』의 역할이 고대의 무지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당면하게 된 난제나 재앙 등에 대한 공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키는 심리적 위안과 정서적 안정 등을 제공하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 『주역』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근대 이후의 물질문명이 초래한 자원고갈, 환경파괴, 인간소외, 자아상실, 몸의 노예화 등의 각종 병리적 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안 모색에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는 새로운 인문학적 과학으로서의 『주역』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김학권 교수(철학과)

 <필자소개>
 ·고려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석사, 대만 문화대학 철학박사.
 ·중국 북경대학 철학과 객원교수, 한국주역학회 회장, 범한철학회 회장, 대한철학회 회장, 국제역학연합회 부회장 등 역임.
 ·현재 원광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 「역경지천인관계연구(易經之天人關係硏究)」 외 다수의 논문과 『주역의 현대적 조명』(공저, (주)범양사 출판사),『주역의 근본원리』(공저, 철학과 현실사) 등의 저서, 그리고 『주역산책』(예문서원), 『주역의 건강철학』((주)정보와 사람) 등의 번역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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