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論語)』의 재해석

 동아시아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하면, 『논어(論語)』를 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한국, 일본에서 공자의 『논어』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그 모두가 공자라는 인물을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자는 누구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공자는 동아시아에서 생명 에 대한 두 해석 중 하나를 대표하는 사상가였습니다. 그 두 해석은 애니미즘과 범신론입니다. 그리고 공자야말로,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습니다.
 공자의 어머니(외가)의 직업이 무당이었다든가, 효(孝)와 조상 숭배나 원유(原儒:원시 유교)와의 깊은 관계
때문에 공자와 유(儒)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유력한 설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공자는 샤머니즘보다는 오히려 애니미즘에 가까운 사상가였습니다.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은 종종 혼동되지만, 전혀 다른 사상입니다. 샤머니즘은 하늘 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그 천국과 지상을 매개하는 무당이 지상에 군림하는 세계관입니다. 모든 가치는 하늘과 하늘이 지상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당은 하늘의 대리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대리인인 무당이 보편적인 가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논어』의 도처에서 이런 샤머니즘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군자는 위에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에 통달한다. (『논어』헌문편)라는 것은, 보통 군자는 고상한 것에 통하지만, 소인은 낮고천한 것에 통한다 (金谷治역주, 『논어』, 이와나미 문고)와 같이 해석되어 있지만, 그러한 의미는 결코 없습니다.
 군자 는 애니미즘적인 교양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소인 은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을 가
지고 있습니다. 이 소인은 모두 하늘 의 보편적 가치에서 연역하고 세속 사회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즉 하늘=위 의 가치가 보편적이라며 그것을 지상 = 아래 세계에억지로 끌어들여 권위로 대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역적인 방법을 하달(下達)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보편적 탁월한 가치 등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군자는 가까운 지상의 사물과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귀납적으로 늘 타당성을 확인하여, 하늘에 다가갑니다. 이러한 방식을 상달(上達) 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천명을 알기까지 오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 애니미즘에서 범신론으로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세계관은 독특한 생명관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것은 생명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나 감성을 공유한 집단 내에서만 인정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니미즘의 세계관입니다.존재하는 돌과 나무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어떤 보편적인 가치 기준에 따라 연역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나 나무를 보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감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결국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씨족사회가 붕괴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의 통일국가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타도되었습니다. 글로벌 세력은 공자의 애니미즘적 세계관을 혐오하고 보편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을 채용했습니다. 그것이 도가에서 맹자, 순자, 법가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 그리고 공자 집단의 후예이면서도 도가의 영향을 받은맹자가 유가의 세계관을 변화시켰습니다. 맹자는 유가이지만 공자 같은 귀납적 방법론을 버리고 도가로부터 배운 연역적 방법론으로 과감하게 확장합니다.
 중국에서는 후에 공자의 애니미즘적인 생명관과 도가와 맹자의 범신론적인 생명관이 팽팽하게 맞서게 됩니다. 그러나 곧 강대한 통일 제국의 탄생과 함께 낡은 애니미즘적인 생명관은 망각되어 『논어』에서의 공자의말도 어느새 의미가 불분명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리하여 『논어』주석의 모든 초점이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범신론적인 생명관의 완성형은 주자학과 양명학입니다. 그 세계관에 이르게 되면 애니미즘적인 생명관은 하등한 것으로 철저하게 멸시되고 거의 완전하게 구축됩니다.
 애니미즘적 생명관을 사회에 남긴 것은 중앙집권적 독재체제가 강고했던 중국이나 조선에서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였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같은 세계관은 명확하게 애니미즘적입니다. 신도(神道)가 원래 애니미즘적 요소가 강한 종교인것이 샤머니즘 계의 종교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인은 특별히 서양 근대의 인간관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나 한국어에서도 인칭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인칭이란 그렇게 10개나 20개도 되지 않습니다. 즉 중국인도 한국인도 하루 1개, 2개의 인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일본인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일본인에게 하나의 정체성이 있는가 라는 형태로 새로운 교육을 한 것입니다. 나는 일본인의 이러한 자기의 복수성이라는 것은, 애니미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애니미즘에 따르면 자체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현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뭔가 확고한 실체 같은 것이있고, 그것이 현상하고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체가 그 자리에서 공동 주관적으로 현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세계가 갈렸다: <2>로서의 문명(文明)

 그럼 애니미즘적 인간관이란 어떤 것인가? 데이비드 흄이 인간은 지각(知覺)의 다발이다 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제 경우에는 흄과는 약간 다릅니다. 인간은 지각상(知覺像)의 다발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즉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보고 듣고 한 상(像)이 잔뜩 있는 다발일 뿐입니다. 우연히 오구라 기조 라벨이 붙어있는 다발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지각상이 들어오면 그 오구라 기조 라는 것은 얼마든지 변해갑니다. 뭔가토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다발입니다. 스파게티 다발 같은 그런 것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히 한데 묶여있으니까 하나의 개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묶여 있을 뿐입니다. 자아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애니미즘적인 인간관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관은 도대체 세계의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저는 문명과 문화라는 키워드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막연하게 가졌던 문명 문화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동아시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명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상상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맨 처음 문명의 기원, 문명의 출발점은 어디였는가라고 하면 아마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는 그 구별이 되지 않는 상태 정도의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땅에 있던 그 동물, 한 종의 동물이지요.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가는 동물이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또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무렵, 아마 문명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의미에서 문명입니다. 즉, 세계가 둘이 되었다, 땅과 땅 아닌 것이 갈렸다, 바로 이 순간이 문명의 순간입니다. 즉 문명이라는 것은 세상이 둘로 되는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 명은 그런 순간입니다.
 그럼 문화란 무엇인가? 문명에는 먼저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진 <2>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불이라는 것을 산에서 분리한 놀라움, 그것을 아마 특별한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숭이가 또 다른 원숭이에게 전하는, 이렇게 전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2>의 놀라움을 전달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단이 발달했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커뮤니케이션합니까? 궁극적으로는자신이 어떤 식으로 세계를 분리했는가 하는 것을 다른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뭔가 말하거나 쓰거나 하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그 놀라움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완전히 놀라움이 사라져 버리면 또 세계는 <2>에서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나로 돌아온 <1>의 세계는 놀라움 없는 땅〔(地)〕의 세계입니다.

  ◆ 놀라움이 사라진: <1>로서의 문화(文化)

 문명과 문화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문명은 여기에 어떤 사람이 백 명이 있다고하면, 그 백 명의 사람들이 24시간 동안 수백 번 수천 번 문명의 순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진 <2>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둘이 된 세계가 하나로 돌아와 버린 세계를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그냥 문화라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서 하나로 돌아가는 그 과정의 전체 프로세스가 문화입니다. <1>뿐 아니라 <2>에서 <1>의 과정, 즉 <1.79>과 <1.63>과 <1.35>과 <1.22>도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화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2>에서 <1>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명 문화와 복잡하게 섞여있거나 서로 반발하기도 합니다. 단지 궁극적으로 가면 <1>에 고정되어 버립니다. 고정화되면 교육과 훈육을 통해 그 문화와 다른 행동을 한 아이들을 꾸짖거나하여 <1>의 제대로 정해진 습관이 그 문화에 따르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권력입니다. 인간은 그런 파워를 쓰고 싶어합니다. 타인을 <1> 세계에 따르게 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독창성은 일절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인이 하고 있는 대로 아이가 해주면 그 아이를 칭찬하는, 이런 세계에 독창성은 없습니다. 아이는 매일 매일 새로운 두 세계, <2>세계, 문명의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오직 중국만 문명이라고 하면 이것은 중국인만언제나 새로운 발견을 많이 하고 한반도 사람과 일본 사람은 그것을 모방하는 그런 관계 밖에 만들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를 요약해 말하자면, 동아시아가 창조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중국이 중심이며, 주위에 한반도와 일본이 있고, 그 한반도와 일본의 어느 쪽이 중국에 가까운 지, 지금으로 말하면 어느 쪽이 서양의 보편적인 가치에 가까운 것인가라고 하는 것으로 싸우는 메마른 관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어디에 사는 누구나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 그렇게 새로이 문명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래서 아마도 우리 속에 고대부터계속 존재하는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수
(일본 교토대학교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필자소개>
·일본 도쿄대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과정 수료.
·일본 동해대학 교수 역임.
·현재 일본 교토대학대학원 인간환경연구과 교수.
·일본의 공영방송 NHK의 한글강좌를 담당하여 일본의 한류 붐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함.
· 주요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마음으로 아는 한국』, 『창조하는 동아시아』, 『주자학화하는
일본 근대』, 『입문 주자학과 양명학』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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