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쓰 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 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로벌인문학 강좌의 내 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 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

열대, 자연과 서양문명을 이해하는데 왜 중요할까?

열대는 콜럼버스 이후 전개되어 왔던 인류사(human history)에서 지리적 공간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열대는 지리적 공간인 동시에 개념적 공간 이다. 유럽은 열대를 지리적으로 발견 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유럽의 문명적 이해관계에 맞게 열대를 개념적으로 발 명 하여 갔다. 문명의 이름으로 유럽은 열대를 타자화(他者化, the otherness)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하나, 세계는 동양 대 서양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열대, 서양, 동양의 개념적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서구중심주의이건 아니면 중화주의이건 간에, 동양 대 서양이라는 이분법은 필연적으로 중심주의적 역사로 치우치게 되어 있다. 개념적 공간으로서의 열대의 인식은 동양 대 서양의 이분법적 역사인식의 극복을 지향한다. 다른 하나는, 서구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은 인류사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필자는 이런 인류사 중심의 역사인 식의 대안으로 인류사와 자연사(natural history)의 융합적 역사 인식을 제안하면서, 열대가 이런 융합적 역사 인식 을 위한 검증하기 위한 최적의 공간임을 보여줄 것이다.

왜 역사인식에서 인류사와 자연사를 융합적으로 파악해야 할까?

모든 인류 문명은 자신의 역사를 발달시켜왔다고 말 할 때, 흔히 인류사만을 생각하기가 쉽다. 그런데, 이는 역사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자연사(自然史)라는 다른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자신만의 인류사는 물론이거니와 고유한 자연사를 발달시켜 왔다. 예를 들 면, 고대 중국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산해경(山海經)』 과 고대 그리스의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각각 그 사회에서 나름대로 발달해왔던 자연사에 대한 기록이다. 유럽에서 자연사가 가장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인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프랑스의 자연사 연구를 이끌었던 뷔퐁(Georges-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은 자연사와 인류사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거의 붙어있는 시간 의 그림자에 의해 한 팔을 묶인 인류사는, 다른 한 팔을 뻗어봐야 그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 지구의 작은 부분에 닿을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자연사 는 지구의 모든 공간을 전부 포용하는 바, 자연사에는 우 주라는 한계 외에는 다른 어떤 한계도 없다. 역사에서 자연사와 인류사가 분리된 이유는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의 학문 체계에서 자연사가 고생물학, 지질학, 광물학, 선사학(先史學), 민속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으로 분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사유의 환원론적 방법론이 자본화되고 있는 현대에, 여덟 학문 분야를 각각 이해하기도 힘든 상황에 서 어떻게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지적 냉소주의가 대학 사회를 휘몰아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사를 역사의 전면으로 다시 복원하여 인류사 와의 융합적 지평을 확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18 세기 유럽에서 자연사와 인류사가 분리된 역사적 과정을 이해할 때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다. 유럽 사회가 열대로의 탐험을 통하여 열대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유럽 중심의 인류사와는 구분되는 열대에 관한 전 지구적인 자연사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특히, 열대 남태평양은 콜럼버스에 비견에 비견 될 정도로 유럽의 두 번째 신세계 발견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유럽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물, 식물, 동 물들을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난생 처음으로 보면서, 타히티를 비롯한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이야말로 자연사 의 보고(寶庫) 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과는 피부색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열대 풍토 및 기후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나아가서 사회와 문명의 진보와도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열대의 자연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유럽은 인류사와 자연사의 의미를 대비 하면서 적극적으로 해석해나갔다.

문명 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열대와의 관계에서 사용되었을까?

문명 또는 문명화(civilization)는 원래 18세기말 프랑스에서 창안된 개념인데, 크게 보면 프랑스와 열대와의 접속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생 도밍그(Saint-Domingue)와 같은 신세계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노예들을 지배하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파견되었던 관료들은 프랑스가 이 노예들을 문명화시켜야 식민지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주도했던 혁명으로 노예들이 해방되자, 프랑스의 관료들은 노예들에 대한 폭력보다는 문명화가 효과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당시 신세계의 최대 무역 시장이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식민지인 생 도밍그 에서 일어났던 소위 아이티 혁명 (1791-1804)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노예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프랑스 사회만이 이를 결정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대부분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건너왔던 생 도밍그의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 사회로부터 문명화 훈육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노예제의 굴레를 벗어 던졌던 것이다. 프랑스 사회의 경제적 토대였던 노예 통상 무역과 노예 제도는 파국적 위기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 제도의 개혁도 절박하게 요 청되었는데, 이런 상황은 문명화라는 개념이 18세기말 프랑스에서 탄생하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인 맥락이 되었다. 이와 같이 문명화 개념의 성립 과정은 서구의 열대 식민지에 대한 지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서구, 열대 자연사를 통하여 어떻게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해왔을까?

인도 벵골이 낳은 세계적인 과학자인 찬드라 보스 (Jagadish Chandra Bose, 1858-1937)는 자연을 광물, 식물, 동물로 나누고 있는 철학적 입장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격생물 센싱(Remote Biological Sensing)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전기공학자 조지 로렌스(Lucas George Lawrence)는 찬드라 보스의 과학적 성과를 이어 받았다. 그는 식물들이야말로 진정한 우주적 존재라고 말하면서 무기질의 세계였던 태고의 지구를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바꿔 놓은 그들의 재간은 거의 완벽 한 마법이 아닌가! 라고 찬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주와 감응하는 가장 원초적인 공간인 집안에 식물적 공간의 축소판인 정원을 가꾸려고 한다. 찬드라 보스가 밝혀내었던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 타파는 당대 유럽의 과학계는 물론이거니와 예술계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앙리 베르그송 은 보스의 훌륭한 발명 덕택에 벙어리였던 식물은 이제 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들 삶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엮어 내기 시작했다. 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주창자였던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표현을 빌리면,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로 세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오산이다. 문학과 과학철학의 융합적 지평을 추구했던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공기와 꿈』에서 대지의 환희를 풍요와 중량이라 말한다면 물의 환희는 부드러움과 휴식이며, 불의 환희는 사랑과 욕망이며, 공기의 환희는 자유이다. 라고 말했다. 바슐라르는 독일철학자 니체의 영향을 받아 식물적 우주에 주목하다. 식물적 우주는 생명의 원초적 이미지이다. 식물적 공간에서 인간과 자연은 합일을 이룬다. 식물적 우주의 색깔은 녹색이다.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는 원형식물과 색채에 대해 천착하면서, 자연 자체야 말로 색채와 빛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학 이론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식물형태학을 연구하는 데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색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식물의 어린잎들이 녹색이 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되었다. 괴테에게 자연은 과학과 예술을 상보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 그는 색채를 과학과 예술의 상보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괴테가 특히 주목했던 자연은 지구였다. 그는 지구도 식물이나 동물과 똑같은 리듬으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 하는 유기체로 인식하였다.

한국 사회, 열대 자연사에 대한 어떤 문명적 지평을 추구해야 할까?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그동안 서구문명의 패러다임을 대체로 밟아왔던 한국 사회가 열대 자연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18세기 조선 사회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자연사를 발달시켰었다. 홍만선(16 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漁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漁譜)』, 정학유의 『시명다식(詩名多識)』, 이규경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 博物考辯)』 등은 조선 후기 사회의 자연사에 대한 확실 한 기록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한국사 전 공자들은 인류사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려고 해왔기에, 조선 후기의 자연사는 실학의 울타리 내에서 한국사로 이해되어 왔다. 이 시기 자연사는 한국사의 틀 안에서 갇혀 왔다. 그렇기에 자연사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 서 허공을 맴돈다. 한국 사회 - 역사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인들까지 포함하여 - 의 자연사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열대 자연사에 대한 문명적 문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강조하건데, 세계는 동양과 서양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열대는 동양도 서양도 아니다. 열대는 독자적인 자연사와 인류사를 발달시켜왔다. 한국 사회의 열대 자연사에 대한 인식은 서구문명의 그것을 더 이상 추종해서는 안 된다. 노벨문학상 작가 르 클레지오(Le Clezio)의 소설 『아프리카인』은 앞으로 한국인들이 열대 자연사에 대한 서구문명의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 어떤 문명적 지평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래서 필자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의 눈으로 보라!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의 입으로 말하라!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의 코로 맡아라!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의 혀로 맛보라!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의 귀로 들으라!

이종찬 교수 (아주대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및 열대학연구소)

<필자 소개> 한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열대학연구소 설립, 열대 학(Tropical Studies)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노력 (http:// blog.daum.net/tropics_cosmos). 하버드대학 과학사학과 및 옌칭연구소, 국 캠브리지 동아시아과학사연구소 및 웰컴(Wellcome) 의학사 연 구소 등의 방문학자. 현재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재직. 저서로 『열대와 서구: 에덴에서 제국으로』, 『파리 식물원에서 데지마 박물관까지』, 『의학의 세계사』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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