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지난 10년에 걸쳐 나는 한국의 근대소설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전념해왔고, 금년 들어 방금 그 일을 완성한 상태다. 시기에 따라 각각 두 권으로 분리시켜 만든 이 사전은, 지난 2월 이미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1917-1950)이란 이름으로 한 권이 출간되었고, 『한국근대소설사전』(1890-1917)이라는 이름의 다른 한 권은 이번 6월에 간행될 예정으로 지금 출판사에서 작업 중이다.

  [소설사전]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근대소설을 총망라하여 한 줄에 꿴 소설안내서이다.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 사전은, 1890-1950년 사이에 나온 우리나라의 모든 ① 개화기 신소설, ② 번역·번안소설, ③ 1917년 「무정」이후의 단편을 제외한 모든 중·장편소설을 총망라한 책이다. 대학에서 소설론을 가르치고 또 연구하다보니, 그 동안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이 시기 우리나라 모든 소설들의 소재를 파악해보고 싶었고, 그것들을 한 자리에 모아 체계적으로 엮어 둠으로써 앞으로 소설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전소설 이후 근대개화기소설부터 1950년 6.25 직전까지의 소설들을 총망라한 소설사전을 편찬하고자한 것이다. 이 시기는 1917년 「무정」을 기점으로 다시 두 권의 책으로 나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1917년
「무정」을 현대소설의 기점이라고 가정했을 때, 「무정」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고전소설과 만나는 지점에서 멈춘 것이 『한국근대소설사전』이라면, 거꾸로 1917년 「무정」부터 해방 이후 해방공간까지 내려가다가 6.25직전에 멈춘 것이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이다. 먼저, 『한국근대소설사전』(1890-1917)은 해당 시기의 모든 개화기 신소설과 번역·번안소설을 수록하였다. 근대개화기소설은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야기나, 단행본으로 출간된 딱지본이나, 이야기의 속성상 장·단편의 구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도 여기서는 그것들 모두가 분량에 관계없이 장편소설이다. 길고 짧음이 없이 하나의 이야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 사전은 개화기 신소설 외에도 같은 시기 번역소설과 번
안소설도 포함시켰다. 다음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은 1917년부터 1950년사이의 모든 장편소설을 수록하였는데, 이 말은 단편소설을 제외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 소설사에 장·단편의 구분이 생긴 것은 「무정」이후부터지만, 이때도 중편이란 개념은 확실하지 않았다. 장편과 중편과의 구분도 그렇거니와 중편과 단편과의 구분도 애매하였다. 결국 여기 수록된 중편소설은 중·장편의 구분 없이 장편소설로 처리하였다.

  [소설사전]은 왜 필요한가?

그 동안의 소설연구는 선학들의 문학사나 소설사 또는 작가작품론에서 선점한 작가와 작품을 뛰어넘지 못한 채기왕의 인기작품, 기왕의 유명작가에만 집착하여 그것들을 반복적으로 거론하는 경향이 많았다. 현재 거론된 작가 작품보다 거론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만 작가 작품이 몇 배나 더 많은 현실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이 점에서 소설사전은 앞으로 우리 소설연구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음, 지금까지의 소설연구는 순수소설, 경향소설, 대중소설, 통속소설, 애정소설 등등 매우 불필요한 개념에 갇혀있었고, 순수소설이 아니면 다른 관점에서는 연구조차 하려 하지 않는 풍토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이 순수만 고집하다보니 우리 문학연구는 절대가치라는 명분에 발이 묶인 채 자유로운 문학의 활로를 열어가지 못하였고, 그 사이에 문학은 어느덧 다른 영상매체에 밀려 설자리를 읽은 지 오래였다. 최근 성행하는 영상매체와 문학의 위축을 비교해볼 일이다. 이것은 소설의 몰락이 아니라, 순수의 몰락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번 소설사전을 계기로 그 소설목록과 내용이 집대성되면, 무엇보다도 그 전체 윤곽을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근대소설의 시작이 어디인지, 그것들이 언제 어떤 식으로 변화를 모색하였는지, 방향을 짐작할 수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전체 연구사 가운데 어느 지점에 해당되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장차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면에서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근대 개화초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공간까지, 이 사전의 시기는 한국 근대 120년 역사 가운데 겨우 반세기를 넘긴 60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세기에 해당되는 전후 산업사회 문학에 대한 연구도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계속될 것을 기약하며, 그 동안 우리 시대를 이끌어온 소설의 선구적 역할을 돌아볼 때 그것은 가히 소설의 시대 라고 할 만하다. 소설이 그만큼 한 시대의 영광과 박수갈채를 누렸다는 말이다.

  문자매체의 타성/ 전자매체의 극성


그런데 이제 소설의 시대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영광과 번영을 구가하던 소설의 시대가 아니라, 갈망과 침체에 허덕이는 시대가 되었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 이유를 전자매체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전자매체의 등장은 곧 문자매체의 침체를 의미한다. 그 동안 문자의 위력만 믿고 문자매체에만 매달려오던 우리에게 전자매체는 새로운 호기심과 편의를 제공하였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던 독자들의 관심이 TV나 영화, 비디오, 컴퓨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쏠려버렸다. 이른 바 영상매체의 시대
가 도래한 것이다. 신문이 팔리지 않는다,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 소설이 팔리지 않는다. 이른 바 소설의 위기 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그 위기설의 진상을 파헤쳐 보고, 새로운 소설의 미래를 점쳐볼 필요가 있다. 전자매체의 극성이 과연 문자매체의 몰락을 의미하는가? 문자매체의 침체가 관연 소설의 위기로 직결되는가? 인간에게 문자매체란 무엇이고, 전자매체란 또 무엇인가? 이 문제를 놓고 우리는 여러 가지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문자매체는 무엇보다도 시공을 초월하는 안정성과 지속성과 보존성이 특징이다. 얼핏 보기에는 지역과 민족과 시대 안에 갇혀있어서 제한적이고도 폐쇄적인 불편한 도구 같아 보일 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인류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공용해온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도구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비하면 영상매체는 그 화려함, 파급력, 자극성이란 점에서 일단 문자매체의 인기를 능가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 일시적이고도 자극적인 선동성만으로 어찌 문자매체의 정확성, 신뢰성을 이길 수 있겠는가. 따라서 최근 영상매체가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고 극성을 부린다고 해도, 그 자체가 문자매체의 위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 영상매체의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발명일 뿐, 그 동안의 문자매체 또한 고스란히 살아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문자는 스스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매체의 등장은 매체의 변화일 뿐 그것이 곧 문자매체의 위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문자매체는 오히려 전자매체의 등장을 계기로 자기 자리를 한층 더 공고히 지킬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말하자면 문자매체의 안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운명도 문자매체의 운명에 힘입어, 그것이 설령 변화를 겪기는 할지언정 위기를 자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자매체가 더욱더 확실하게 제 자리를 잡아가고 안정을 되찾는 데 소설이 어찌 흔들릴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서사의 시대-이야기와 감성문제는 변화이다. 소설이 달라져야 한다. 매체가 달라진 만큼 소설도 달라져야 한다. 문자매체의 시대가 가고 영상매체의 시대가 왔다고 해서, 소설마저 실종된 것은 아니다. 소설은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영상매체 속으로 녹아들어갔을 뿐이다. 문자매체라는 옷을 벗고 영상매체라는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문자매체로서의 소설이기를 포기하고, 영상매체로서의 서사이기를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나는 현 세태를 서사의 시대 라고 정의하고 싶다. 마침내 소설의 시대가 가고 서
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사는 이야기의 본질이다. 이야기 하기는 인간의 본능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노동요를 부르면서 일하였다. 이야기와 노래는 인간의 본능이다.
여기서 잠시 롤프 옌센(Rolf Jensen)의 『드림소사이어티(The dream society)』를 참고하여 방금 도래하고 있는 서사의 시대 를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 책은 21세기 미래사회를 드림소사이어티 라고 규정한다. 이 책에 의하면 정보사회의 태양은 이미 지고 있다 , 우리는 어느덧 드림소사이어티를 맞이하고 있다 , 그리고 드림소사이어티는 장차 다가올 미래사회가 아니라, 현재 직면하고 있는 현실세계 이다. 롤프 옌센이 말하는 드림소사이어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드림소사이어티의 주체를 이야기 와 감성이라고 단언한다. 정보사회에서는 모든 일이 정보기술에 의해 추진되어 왔으나, 드림소사이어티에서는 정보뿐 아
니라 이야기와 감성에 의해 추진될 것이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드림소사이어티란 꿈과 감성 을파는 사회다. 상품의 기능적인 가치 때문에 수요가 느는것이 아니라, 상품에 담긴 이야기가 구매결정에 결정적인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상품이 아니라 상품에 담겨 있는 멋진 이야기 를 팔아야 한다. 인간은 왜 이야기를 갈망하는가? 옛날부터 인간은 말이나 이미지 또는 글로 표현된 신화나 동화, 전설과 함께 살아 왔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이야기와 전설이 있었다. 인간이 마치 도구를 사용하고 음식과 주거지를 찾는 것처럼, 이야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 그 자체이다, 즉 호모사피엔스에 대한 정의의 일부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소설시대의 주역인 작가는 문사요, 지사였다. 그들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인텔리겐챠로서의 정치지도자요, 문장가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정치지도자란 과거시험에 합격한 문장가로서, 국가민족의 운명을 그들이 이끌었다. 근대문학작가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일제시대, 해방공간, 전후 산업사회, 분단시대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대사를 돌아볼 때, 한 시대와 사회의 중심에는 언제나 문학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문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능인의 역할을 자임했다고나 할까? 세상을 향해 뭔가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어느 덧 거대한 상업주의의 그늘에 숨어 꿈과 감성 을 파는 기능인이 되고 말았다. 매체가 문자에서 전자로 바뀌고, 작가가 문사에서 기능인으로 전락한 오늘날, 소설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창작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 패러다임의 큰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뿐이다. 소설이 위기를 선언할 때가 아니라, 변화를 시도할 때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롤프 옌센의
드림소사이어티 를 떠올린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송하춘 교수(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명예교수)
 

<필자소개>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창작집 『한번 그렇게 보낸 가을』,『은장도와 트럼펫
』, 『하백의 딸들』, 『공룡의 꿈』등, 장편소설 『거슬러
부는 바람』, 『태평양을 오르다』등, 연구서 『발견으로서
의 소설기법』,『탐구로서의 소설독법』,『소설발견 1-6』,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한국근대소설사전』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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