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화의 개념 

 우리가 일상적으로 일컫는 평화는 대개 전쟁이 없는 상태로 정의된다. 그러나 질병이 없다고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듯이,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롭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전쟁은 폭력의 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1960년대 초부터 서구에서 발전되기 시작한 평화학 또는 평화연구에서는 평화를 전쟁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전쟁을 비롯해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신체에 피해를 주는 직접적/물리적/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 같은 간접적/구조적/제도적 폭력까지 없어져야 진정한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평화학자 또는 평화연구자들은 평화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 (negative peace)'라 부르고 구조적 폭력까지 없는 상태를 '적극적 평화 (positive peace)'라 일컫는다.
 
 2. 여성에 대한 다양한 폭력 
 여성은 인구의 절반이다. 절반의 인구가 다양한 방법으로 폭력을 당하거나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에 관계없이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거나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동서고금을 통해 나타난 현상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전통과 영향에 따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 문화가 되어버렸고, 그러한 폭력적 문화 (violent culture)는 다시 문화적 폭력 (cultural violence)으로 이어졌다.
 첫째, 여성에 대한 직접적/물리적/신체적 폭력은 남성의 완력과 만용이 여성에게 물리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의 사례는 가정에서 매 맞는 아내를 통해 찾아볼 수 있고, 사회에서는 성폭력 등으로 드러난다.
 둘째, 여성에 대한 간접적/구조적/제도적 폭력은 각종 법률과 제도를 포함한 사회구조를 통해 여성들이 당하는 차별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여성들의 사회 진출 욕구가 늘어도 취업하기가 어렵고, 일자리를 잡아도 직종이나 작업 조건, 직업 안정성 및 승진 기회, 그리고 임금 등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기 쉽다.
 셋째, 여성에 대한 문화적 폭력은 여성에 대한 직접적 폭력이나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재생산하는 문화를 일컫는다. 학문과 예술, 그리고 종교와 전통 등을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남녀불평등이 당연하게 여겨지거나 조장되어 그러한 폭력이 생활과 습관으로 되어버리는 현상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은 주로 남성에 의해, 구조적 폭력은 주로 사회제도와 법률에 의해, 문화적 폭력은 여성 스스로에 의해서도 가해지고 있다.
 
 3.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난 직후 한 여성단체가 거리행진을 하며 내건 시위구호 가운데 하나는 "첩제도를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남성들이 정식 아내 또는 본처 외에 부실이나 소실이라 불리는 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게 드물지 않았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남녀평등 운동이 전개되면서, 2000년대엔 가정주부들 사이에 "남편 말고 애인이나 남자친구 하나 없으면 바보"라는 얘기가 퍼질 정도로 여성들의 성 활동도 자유로워졌다. 나아가 양성평등을 주장하며 '엄마 성 쓰기 운동'도 전개되고, '여성 상위 시대' 또는 '장모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이전까지는 남편의 온갖 폭력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사는 게 아내의 미덕이나 여성의 본분으로 간주되어 이혼은 죽음보다 어려운 선택일 수 있었지만, 1980년대 이후부터는 이혼이 "또 하나의 선택"으로 장려되기도 하여 2000년대엔 세계 최상위권의 이혼율을 기록하게 되었다. 정치권에서는 여성 총리에 이어 여성 대통령도 탄생하게 되었듯이, 한국에서 여성의 지위나 여성을 둘러싼 환경은 이렇게 크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여성에 대한 폭력적 문화가 만연하고 이는 문화적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에 '총학생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여학생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총남학생회'가 따로 존재하는 대학은 전혀 없을 것이다. 정부에는 '여성'을 관할하는 행정부처가 있지만, '남성'을 관할하는 행정부처는 없다. 여성의 권익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나 목표는 바람직하지만, 이는 그 만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게 아니겠는가.
 
 4. 여성에 대한 문화적 폭력의 사례
 <사례 1: 가사노동의 불인정을 통한 존재감이나 정체성 부정>
 주부들에게 직업이나 하는 일을 물어보면 "(가정)주부" 또는 "집안일을 한다"고 대답하는 여성들보다 "직업이 없다"거나 "집에서 논다"고 대답하는 여성들이 많다. 가사노동 즉 집안에서 육아나 요리 또는 청소 등 "뼈 빠지게" 일을 하면서도 "그냥 논다"고 말하는 등 여성 스스로 자신의 존재나 자신이 하는 일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례 2: 남성은 주역, 여성은 보조라는 성차별적 인습>
 1990년대 후반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그를 반장으로 지명하고 한 여학생을 부반장으로 지명했는데, 아들이 싫다고 했더니 여학생을 반장으로 임명하고 그를 부반장으로 임명했단다. 아들에게 왜 반장이 싫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반장은 매일 점심시간에 교무실에 가서 우유를 가져오는 등 심부름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온지 1년 남짓 지나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학교에서 놀림이나 야유를 당하고 생활하지만은 않겠다 싶어 나는 만족하며 웃었다. 그러나 아내의 반응은 크게 달랐다. 주저 없이 "그러면 사내자식이 계집애 밑에서 부반장할 거니?" 하고 다그쳤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국에서 20여년 살았던 사람으로 가정에서부터 남녀평등을 주장해온 여성이 오히려 성차별을 당연시하며 부추긴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아들의 담임인 여교사는 학생들의 능력이나 자질에 관계없이 '반장은 남학생, 부반장은 여학생'이라는 오랜 관행의 성차별을 저질렀다.
 <사례 3: 가사는 여성만의 일이라는 성차별적 편견>
 2000년대 초 어느 날 퇴근하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반찬거리를 사들고 나오다가 내 수업을 받는 여학생 둘과 마주쳤다. "교수님, 여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반찬거리 좀 사가는 길이에요." "어머머, 교수님이 반찬거리를 사요? 내일 학교 가서 소문내야지." 20대 초반의 여학생 또는 신세대 여성조차 장보기를 여성의 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사례 4: '삼종지도'를 당연시하는 성차별적 관행>
 2000년대부터 가끔 결혼 주례를 보는데, 주례사에서 반드시 강조하는 대목이 부부평등이기 때문에, 주례를 부탁받으면 신부에게 신랑과 동시에 입장하도록 권유한다. 신부가 예식장에 들어설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들어와 신랑에게로 건네지는 모습은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 (三從之道: 여자의 세 가지 도리)'의 한 사례로 남녀평등과 너무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부측으로부터 거절당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이 관행 아니냐며 아버지도 원하고 자신도 바란다는 것이었다.
 
 5. 여성에 대한 폭력 없는 세상을 향하여 
 1993년 10월 유엔 총회는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을 철폐하라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99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 4차 세계 여성 대회에서는 모든 법과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보장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제 한국에서도 여성의 사회 참여와 복지 증진을 통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한 법률과 제도는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특히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통령 직속의 여성특별위원회를 신설하여,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 및 남녀평등 실현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해왔다. 예를 들어,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으며 「남녀 고용 평등법」을 고쳤다. 남녀 차별 금지 분야를 공공 기관까지 확대하고, 직장 내에서 성희롱이 줄어들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2013년 3월 발표된 유엔개발계획 (UNDP)의 <인간개발보고서 (Human Development Report>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의 성 불평등 지수 (Gender Inequality Index)가 0.153으로 크게 낮아졌다. 약 200개 국가 가운데 하위 27위이니 매우 좋은 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2012년 30대 기업의 신규 채용 성비를 보면 취업자 10명 중 3명만 여성이고, 남성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도 매우 컸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그에 남녀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개혁과 함께 또는 그에 앞서 우리들의 의식과 사회적 관행을 고쳐야 할 것이다. 첫째,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의 담당자인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잘못된 관행에 다시 젖어드는 과거 지향적 태도보다는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선도해가는 미래 지향적 태도가 필요하다. 둘째, 각종 폭력의 희생자인 여성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남성의 완력과 만용이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면, 여성의 순종 의식과 무관심 그리고 체념은 여성에 대한 문화적 폭력의 윤활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자면, 여성에 대한 차별과 그에 따른 남녀 불평등을 없애는데 큰 벽은 여성 차별을 부추기는 사회의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성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다. 남성들의 신체적 우월에서 나오는 완력과 가부장제에 근거한 만용은 물론이요, 여성들의 삼종지도에 따른 순종 의식, 남녀평등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남녀 차별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은 더 큰 벽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제거하지 않고 평화로운 사회를 지향할 수 없고, 남녀평등을 이루지 못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 
  이재봉 교수(행정·언론학부)
<필자소개>
· 하와이대학교 정치학박사, 남이랑북이랑 통일운동 대표
·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장, 한중관계연구원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
· 원광대학교 행정·언론학부 교수
· 저·역서로『두 눈으로 보는 북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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