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이라는 단어를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적으면 '여순 반란'이라는 단어가 자동 완성된다. 전라남도 여수시와 순천시를 합쳐 부르는 '여순'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잊혀져버린 사건을 환기시키는 명칭이기도 하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시작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무장봉기가 진정되지 않자, 국군과 경찰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14연대 병사들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 파병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한다.

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됐다. 10월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 순천에 진입했다.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하면서 그 규모는 늘어났고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정부는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고 발표하며 진입작전이 시작됐다.

진압군이 여수 공격을 감행 중이던 10월 25일, 국무회의는 '여순지역계엄령'을 통과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정규 병력은 이미 산악지대로 탈출했고 이로 인해 진압군 작전은 정규 반란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게 됐다. 전 시민들은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당시 심사의 기준은 '교전 중인 사람',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사람', '흰색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사람'등으로 모호했다.

진압군의 부역자 색출 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됐다. 1949년 1월 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 가옥 피해는 8,554호(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이다. 피해의 대부분은 진압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피해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여순사건'을 학생들에게 교육하지 않고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일부 학생들에게 사건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여순반란사건'이라 규정했던 교과서도 사건이 지난지 48년 뒤인 1995년부터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하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잊혀져만 가는 '여순사건', 역사의 흐름 속 하나의 사건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다. 오는 19일, 사상단체의 충돌 아래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잠시라도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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