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기술의 중요성을 외면하고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인문학적 상상력이나 예술적 창조력이 무시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인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창조력을 기반으로 발전해왔던 인류가 이제는 과학적 합리성의 중요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인문학과 자연과 인간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자연과학의 융합이 핵심이다. 그렇다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합쳐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고,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합리성
 
 인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상상'이고, 자연과학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증명'이다. 인문학적 상상에는 아무런 한계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생각은 오감을 통해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그런 인식이 우리 생각의 기반이 된다. 경험의 범위가 좁으면 생각의 범위도 좁을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우리의 경험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으로 한 번도 직접 본적이 없는 코끼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상상(想像)도 우리에게 중요한 지적 활동이다.
 우리의 상상은 이야기로 형상화 된다. 우리의 역사,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에서 시작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는 물론이고 거창한 신화와 전설도 모두 우리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인식도 상상을 통해 완성된다. 실제로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인식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알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현실 인식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는 상상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상상은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의 역할도 하고, 개인의 다양한 경험을 서로에게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그런 뜻에서 인류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진화가 모두 우리의 상상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문학적 상상력이 강조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철저하게 통제된 실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증명'이 인류 문명에 미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과학적 증명의 엄청난 영향력은 17세기 근대 과학혁명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이 되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에 대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에서 얻은 결론은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것이었다. 증명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실용적인 기술의 개발은 인류 전체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렇다고 인문학적 상상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오늘날에도 상상은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해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오히려 기술이 놀라운 수준으로 발달함에 따라 우리의 상상은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되었고, 상상의 범위와 영향력도 더욱 넓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과연 인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을 의도적으로 육성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오늘날  융합이 강조되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분열과 갈등이 효율만 추구하던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고착화된 극심한 분화와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의 '융복합'(convergence)이 미래를 위한 유일한 전략이고, '통섭'(統攝)과 융합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학문 영역이 너무 잘게 갈라지는 것이 결국에는 발달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지나치게 갈라진 학문 영역을 서로 합쳐야만 새로운 발전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나치게 좁고 깊은 것'을 경계하고 '얕지만 넓은 것'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융합이 효율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70년대에 일상용품에서 플랜트 설계에 이르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취급하여 우리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종합상사'의 등장이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우리는 과도한 융합이 오히려 효율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경험했다.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종합상사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전문화된 기업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 그 결과였다.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종합상사보다는 제한된 분야에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전문화된 기업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모든 것을 무작정 융합시켜서 하나로 만들기만 하면 단절의 문제가 해결되고, 소통이 원활해지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융합을 통해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하고, 융합을 실천하는 현실적인 방법론도 찾아내야 한다. 융합의 한계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융합의 필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겉으로만 그럴듯한 형식적인 만남을 융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낮은 수준의 융합도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고착화된 과도하고 불합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융합이 그런 것이다. '문과'와 '이과'로 대변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심각한 단절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과 성향의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문학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문학적 성향의 사람들은 현대 과학과 기술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차별적인 융합의 열풍이 휩쓸려 자칫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담을 해체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높이의 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융합은 정체성 확립과 소통이다. 다양한 사상과 지식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나루터를 찾아가는 '문진'(問津)의 정신이 진정한 융합의 길이다.
 
 창의적 문화를 위한 문진의 길
 
 지난 400여 년 동안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과학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융합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과학 정신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말한다. 객관적 증거에 대한 정직성, 합리성, 개방성, 민주성, 비판성이 그 핵심이다. 
 그런 과학 정신은 자연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소통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소통의 단절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물론 왜곡된 증거를 가려내고, 합리성을 가장한 경직된 교조주의를 배척하고, 비판만을 위한 비판과 폐쇄적 이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환경이 전제되어야만 그 힘이 발휘된다.
 교육의 목표도 분명히 해야 한다. 입시를 통한 출세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공교육을 전인(全人), 공인(公人), 생산인, 자율인으로 정의되는 홍익인간을 길러내도록 확실하게 개혁해야 한다. 한 마디로 줄이면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에 유능한 민주 시민의 역량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가르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대학에서의 학과 간 장벽도 적절한 수준으로 허물어야 한다. 물론 대학의 전공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중등 학교의 교육을 내실화함으로써 대학에서 낭비적인 교양 교육의 필요성을 감소시켜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비싼 비용을 부담하는 우리 사회의 대학생들에게 사회 교육으로도 충분한 교양 교육을 요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대학의 교육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그 대신 학과와 전공 사이의 장벽을 낮춰서 관련된 전공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논어(論語)의 미자편에 나오는 '나루터를 묻는다'는 문진(問津)의 자세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진정한 융합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나루터는 본래 다양한 사람과 물산이 만나서 교류와 교역을 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시 출발하는 곳이다. 
 이제 우리의 인문학과 자연과학도 나루터에서 함께 만나 서로 성과를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과학 정신으로 다시 출발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의 성숙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문진의 자세에서 핵심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것이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상대를 정당하게 인정해줄 수도 없고, 다른 분야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상대와의 소통을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서로 단절된 경험을 가진 분야에서는 똑같은 언어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단절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언어의 독립적인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사용하는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원만한 합의에 이르는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적 지식이 과학자의 합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역이 전혀 다른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에서는 합의가 상대의 성과를 인정해주는 유일한 길이 된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갈등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창의는 공허한 꿈일 뿐이다.

이덕환 교수(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필자소개>
 · 서울대학교 화학과, 미국 코넬대 화학과 졸업.
 · 현재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사)대한화학회 회장 역임(2012).
 · (사)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2013-현재).
 ·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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