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유사(遺事)'는 잃어버린 혹은 남겨진 일들을 뜻한다. 아마도 150여 년 전에 나왔던 <삼국사기>에서 빠뜨렸던 기록들을 보완했다는 의미가 짙은 것 같다. 이 책의 편찬자는 승 일연( 一然 : 1206-1289)으로 알려져 있다. 일연을 찬술자로 보는 유일한 근거는 권5의 시작에 있는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유사』는 일연이 인각사의 주지로 있었을 시기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각사의 주지로 갔을 때는 그의 나이 79세였고, 84세에 열반에 이르렀으니, 그 사이에 『삼국유사』의 편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기에 『삼국유사』의 집필이나 편찬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탑상 편의 '가섭불연좌석'이라는 글은 그의 나이 76세에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각사의 주지로 오기 훨씬 전부터 『삼국유사』의 편찬에 관심을 기울여 왔던 셈이다. 
 그러나 기록에 있다고 해서 편찬자 내지는 저작자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우선 편목에 따라 기술 태도에 편차가 많고, 책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때와 그것이 간행되었던  시기 사이에 시간적 차이가 커서 일연의 단독 찬술이라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우선 『삼국유사』의 본문에도 제자 무극이 쓴 글이 있어 일연의 단독 저작물이라는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의해 편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와 탑상 편의 '전후소장사리로'의 끝에는 '이상은 무극이 기록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나아가 사후에 세워진 일연의 비문에는 그가 지었다는 <어록> 2권 등 100여 권이 넘는 불교 서적을 남긴 것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삼국유사』를 지었다는 말은 없다. 이것은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삼국유사』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삼국유사』의 간행도 일연 당대에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를 보면,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하여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주에 '아사달은 지금의 백악궁이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백악궁은 일연이 열반에 든 지 70여 년 후에 완성되었으니, 일연이 그 세주를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제 『삼국유사』가 세상에 나왔을까? 일단 『삼국유사』의 초간본은 백악궁이 완성된 1360년 이후에 나왔다고 봄이 옳다. 그리고 1403년에 권근 등이 지은 『동국사략』에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 있어, 1360년과 1403년 사이에 『삼국유사』가 세상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보는 『삼국유사』는 최남선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다시 가져온 것이며, 조선조 중종 정덕 7년(1512)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한다. 따라서 일연의 생존 시기와는 무려 200여 년의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어떤 변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육당 최남선은 각 권마다 편찬자가 따로 있었을 것이나 전승되면서 그 이름이 빠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그의 견해와 더불어 일군의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의 편찬이 일연을 중심으로 복수의 인물에 의해 수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Ⅱ
 
 『삼국유사』는 객관적 사실과 허구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이른바 팩션(faction)적 서술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당연히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문다. 다음에 보이는 글은 기이 편의 서문으로 허구적 사실을 역사적 현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선명하게 보인다.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약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려 하면 괴이, 완력, 패란, 귀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부명을 받고 도록을 받는 것이 반드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고 그런 뒤에 큰 변화가 있어 천자의 지위를 장악하고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황하에서 (팔괘)그림이 나오고, 낙수에서 글이 나오면서 성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를 둘러싸 복희를 낳았고, 용이 (신농씨의 어머니인) 여등과 관계를 맺어 염제를 낳았으며, (소호씨의 어머니인) 황아가 궁상이라는 들판을 노니는데 자신을 백제의 아들이라 일컫는 신동이 있어 (그와) 교합하여 소호를 낳았고, 간적은 (제비)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으며, 강원은 거인의 발자취를 밟고 기를 낳았고, 용과 큰 못에서 교합하여 패공을 낳았다. 이로부터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이는 기이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에 싣는 까닭이며 의도다. 
 
 옛 성인들은 괴이, 완력, 패란 그리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영웅이 한 나라를 일으킬 때는 환상적이고 경이적인 일들이 따랐다고 하면서 중국의 여러 신화적인 사건들을 기술한 후에, 그러므로 우리 삼국의 시조가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여, 신화적 사건을 역사적 문맥 안으로 수용한다. 가히 신화의 역사화라고 이를 만하다. 그리하여 한국 신화는 신화-역사의 복합형식(mythico-historical cycle)에 속하는 독특한 신화적 장르로 분류된다. 허구적 사실에 역사성을 부여한 태도는 나아가 중원과 주변의 경계를 허무는 무기가 된다. 먼저 단군신화를 기술하면서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때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시기라고 하여 우리의 역사가 중국만큼 오래되었음을 주장한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이야기하면서 고구려의 건국을 한(漢)나라 효원제 건소(孝元帝 建昭) 2년 갑신년이라고 못 박거나, 여섯 촌장들이 혁거세를 맞이한 날은 전한 지절(前漢 地節)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 3월 초하루였다고 하여 신화적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우리의 역사가 중국과 대등함을 밝힌 것이다. 우리의 민족사의 출발을 중국의 요임금 시대와 같은 상고대로 끌어올린 것은 『삼국유사』의 커다란 유산이다. 우리의 상고대를 밝혀주는 책으로 흔히 『삼국유사』와 더불어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거론하지만, 거기에서 한민족 역사의 출발은 신라의 혁거세 거서간부터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기에 『삼국유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의 상고대사는 신화의 영역 안에 그림자로만 남았을 것이다. 
 신성함은 천상적 혹은 종교적인 영역에 속하며, 세속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초월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기에 신성의 영역에 접근하는 것은 세속적인 과업과는 다른 특별한 노력이 요청된다. 그것은 간절한 기원이나 기도 및 종교적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경계를 허문다. 감통 편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보자. 두 사람은 각자의 암자에서 무상의 도를 깨닫기 위해 정진한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난초와 사향 냄새를 풍기는 젊은 여인이 찾아와 하룻밤 유숙할 것을 청한다. 그러나 박박은 절은 여인이 묵어서는 안 될 청정한 곳이라 하여 단번에 거절한다. 그러나 이 여인이 노힐을 찾아왔을 때는 달랐다. 노힐은 이 여인을 머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청에 따라 목욕까지 시켜주고 마침내 박박보다 먼저 성불한다. 불교의 계율만 잘 지킨다고 성불하는 것은 아니다. 박박은 불교의 계를 철저히 지키려는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위기에 처한 여인을 돌 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노힐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계를 지켜야함이 옳지만, 도움이 필요한 여인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참다운 옳음은 계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계율 때문에 거부하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다. 속세에서의 선이 바로 불교적 선이다. 
 세속의 영역에서도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의 차이가 부정된다. 계집종 욱면은 주인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매일 절의 뜰 가운데 서서 염불을 하여 마침내 하늘에 오른다. 선율 법사의 이야기는 죽은 인물이 다시 환생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김현감호' 이야기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허문 이야기다. 신주 편의 이야기들은 불교와 밀교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밀본, 혜통, 그리고 명랑의 세 불승은 주문을 외워 현실적인 장애를 제거하려 한다. 그 행위가 정통 불교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밀교를 불교의 한 영역으로 수용했음을 뜻한다.
 『삼국유사』의 세계관은 이분법적 세계 인식에 대한 거부와 화해라 할 수 있다. 그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당연히 팩션(faction)적 기술이다.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않고 기술하는 태도는 어떠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행위나 사건도 현실의 문맥 안에서 저항 없이 전개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공간 안에서 『삼국유사』는 신화를 역사의 문맥 안에 수용하고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차이를 무너뜨리며, 나아가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 또는 인간과 동물, 불교와 밀교 그리고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영역에 근거한다고 생각했던 대립적 가치를 하나의 현실 공간 안에서 교섭시키고 탐색한다. 환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혹은 기이한 것을 현실적 문맥 안으로 과감히 수용하는 태도는 비단 『삼국유사』뿐만이 아니다. 일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규보와 이제현도 신화적인 사건을 역사적 현실로 수용하였다. 당대는 몽고 침략기였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과 민족의 현실을 타개할 기저의 가치를 그들은 민족의 시원에서 찾았다. 그것을 위해 유학자는 유교의 정숙한 가르침만을 고집하고 않았고, 불승들은 불교의 청정한 진리에만 억매이지 않았다.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 공자의 가르침도 불교의 계도 일단 접었다. 위기가 가져다 준 변화였던 셈이다.

김재용 교수(국어국문학과)

 
  <필자소개>
 ·서강대학교 국어국만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현재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재직.
 ·주요논문에 「동북아시아 지역 창조신화의 비교연구」,「동북아 창조신화와 양성원리」,「한국의 홍수이야기 연구」,「귀신이야기의 기호학」등이 있으며, 저서로『왜 우리 신화인가』,『계모형 고소설의 시학』,『한국고전소설강독』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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