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미리 밝히지만, 이 글을 쓰면서도 크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원광대학교 학생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와 여러분이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이 종이신문을 귀찮다고 여길 것이고, 손에 들어도 잘 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내가 이제 쓰려고 하는 이런 따위 글은 더더욱 인기가 적을 것이다. 사실 우리 시대는 얼마 남지 않은 고전적 의미의 독자들조차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데, 그 최전선에 스마트 기기와 SNS의 연합 부대가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것들의 가공할 공세를 뚫고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잘 들려줄 자신이 없다. 여러분은 바쁘다. 끝없이 손가락을 놀리고, 끝없이 (안부가 아닌 정보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창밖의 풍경을 보지 않는다. 풍경을 보지 않는 21세기의 현생인류는 이미 이야기 따위에 쉽게 눈과 귀를 빌려주지 않도록 진화하는 중이다.

    그래도 나는 '아시아 이야기의 세계'라는 고리타분한 제목을 내걸고 몇 안 되는 독자들하고라도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고맙다. 우선, 여기까지 읽어주어서.

 ▶오늘 우리에게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 글은 아시아의 이야기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왜 중요할까.

 "아프리카에서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 아프리카의 많은 노인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지만, 대지의 역사, 부족의 전설, 천체의 운행 질서에 관해서 알기 쉽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능력 면에서는 가히 천재적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나라 아프리카 말리의 작가 아마두 함파테바는 자신의 자서전(『들판의 아이』, 북스코프, 2008)에서 '들판의 귀'를 가지고 있던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분은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새의 말, 땅을 기어 다니는 조그만 동물들의 흔적, 온갖 종류의 바람소리,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발자국 소리를 다 알아듣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함파테바는 그런 외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 작가가 되었다. 사실 아프리카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먹고 자란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에는 마땅히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가 있었다. 있다면 오직 '암흑의 역사'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때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무수한 노인들이 글 한 자 몰라도 자신의 전 생애와 몇 세대에 걸친 자기 부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기억하고, 저마다 소중한 '이야기 유산'을 간직한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거나 무시한 셈이다. 이것은 물론 아시아의 노인들, 나아가 세계사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다른 모든 지역의 노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때, 노인들의 기억 속에 간직된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보'와는 다르다. 정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설명한다. 저명한 문예사상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지난 세기 초반에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매일 아침 우리들은 지구의 새로운 사건들을 알게 되지만 정작 진귀한 얘기에는 빈곤을 겪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들이 알게 되는 일들이란 모두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미 설명이 붙여져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빈곤을 겪게 된 진귀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의 저 머나먼 초원 한 귀퉁이에 있는 암각화와 같다. 그 암각화들은, 아무리 희미해도, 그 자체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사물의 실체를 1대1로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이야기는 받아들이는 이가 그 의미를 깨닫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을 요구한다.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그때 당장은 호랑이가 왜 곶감이라는 소리를 듣고 달아났는지,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인생의 어떤 고비가 닥쳤을 때, 어른이 된 아이는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들려준 옛이야기 한 토막이 지녔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어른이 된 아이가 학교 교육을 통해서 결코 배우지 못했던 어떤 지혜와 연결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이야기에는 그것을 들려주는 사람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마치 옹기에 도공의 영혼과 손 흔적이 남아 있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이나 마찬가지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칫 쉽게 묻혀버릴 수도 있는 귀중한 이야기들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황무지에도 장구한 세월 사람들이 꾼 꿈의 충적토가 쌓여 있고, 시커먼 모래바람만 날리듯 보이는 아라비아의 사막에도 『천일야화』와 『길가메시』의 주옥같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 것이다. 

 

 ▶아시아의 이야기

 지구화시대, 첨단 IT시대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게 되면서 '정보'가 전면에 나서고, 거꾸로 '이야기'의 권위는 몰라보게 왜소해졌다. 다시 벤야민에 기댄다.

 "'저 좋던 옛날'에는 한때 지구의 품 안에 있던 돌과 천공에 떠 있던 별들이 아직도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던 시대가 있었다. (중략) 그러나 오늘날 새로이 발견된 모든 별들은 점성술의 천궁도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솔직히 우리 시대는 인간이 하늘의 별과 들판의 돌과 이야기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것들이 인간들과 얘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대개의 경우, 그런 것들은 인간의 탐욕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더라도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누이와 함께 헤아리고,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양과 집 나간 토끼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대체 어떻게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아시아 대륙에는 여전히 영혼의 불꽃과 별빛, 그리고 이야기의 전통이 살아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가령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마하바라타>(인도), <게세르>(티베트, 몽골), <마나스>(키르기스스탄), <구르굴리>(타지키스탄)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있더라도 극히 드물 것이다. 그것들이 <일리아드>, <오디세이>보다 훨씬 긴 서사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아시아의 대륙 한끝에 인류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는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원숭이 하누만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는 자기가 충성을 바치는 왕자들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자 약초를 캐러 히말라야로 날아가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산을 뿌리째 뽑아가지고 돌아온다. 그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손오공의 원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페르시아의 서사시 <샤나메>에는 매일같이 두 어깨에서 뱀이 자라는 포악한 군주가 나오는데, 칼로 아무리 베어나도 다시 살아난다. 그 불사의 뱀들을 달래기 위해 군주는 매일같이 어린 아이의 뇌를 바쳐야 한다. 온 나라에 아이들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최근에 발견된, 같은 지역의 서사시 <쿠쉬나메>는 놀랍게도 페르시아에서 바로 그 잔인한 군주 자하크의 횡포를 피해 달아난 왕자가 중국을 거쳐 신라까지 들어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 묘사된 신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상낙원이다. 왕자는 신라 공주와 결혼하여 살다가 나중에 배를 타고 고국에 돌아가 적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다. 

 몽골의 설화에는 내로라하는 명궁들이 수두룩하다. 한 사람이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에 왜 그렇게 하늘을 쳐다보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쏜 화살을 기다려요. 별을 겨냥해 쐈거든요."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개의 별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이어 그가 쏜 화살까지 떨어졌다. 아시아 대륙에는 이런 천하명궁들이 즐비하다. 

 계모의 구박과 이복형제의 질시를 물리치고 끝내 신분 상승을 이루는 이른바 <신데렐라> 이야기는 세계 각국에 천여 종 넘게 존재한다는데, 아시아 각국에도 우리나라의 <콩쥐팥쥐>를 비롯하여 중국의 <섭한 아가씨>, 필리핀의 <마리아>, 베트남의 <떰과 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바왕 푸티흐와 바왕 메라흐>, 태국의 <쁠라 부텅>, 이란의 <머흐 피셔니> 등 거의 모든 나라, 민족에 존재한다. 찬찬히 살펴보면, 아시아 대륙에 얼마나 많은 <선녀와 나무꾼>, <봉이 김선달>, <토끼와 거북이>가 있는지도 새삼 알게 될 것이다.  

 아시아 이야기의 세계는 우리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할 만큼 광대하고 놀랍도록 황홀하다.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 <뮬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왜 아시아의 서사(敍事)에 눈길을 돌렸는가. 그것은 이미 낡은 상상력이 되어버린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서양의 이런저런 옛이야기에 지친 우리 독자들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할 광대한 이야기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인도 신화에, 뮬란은 중국의 서사시 <화목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인구가 무려 일억 육천 명이지만 일인당 국민소득은 기백 달러에 불과한 아주 가난한 나라로, 이따금 참담한 사건 사고 소식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한 소수민족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의 창세신화를 갖고 있다. 거기에서는 지렁이와 가재, 게, 거북 따위 짐승들이 서로 힘을 합해 세상을 창조해 낸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단독으로 창조의 임무를 수행하는 남성적 영웅시로 가득 찬 기존의 대다수 창조신화와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상호 협력'이 중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해 온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로써 방글라데시는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인류가 꾸려가는 문명의 역사에 당당히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에 관한 한, 아시아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보고였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읽어준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부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시라. 

 김남일(소설가)

 

  <필자소개>

· 소설가

· 아시아문화네트워크 책임연구원.

· 주요저서: 장편 『청년일기』,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산을 내려가는 법』, 『백 개의 아시아』(전2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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