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있는 자리

박가연(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누군가는 연동을 회귀의 지역이라고 불렀다. 다들 이곳은 겨우내 눈이 많이 내리고 첩첩산중이라 떠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도 스물이 되자마자 연동을 떠났지만 이내 곧 돌아오게 되었다. 엄마도 외할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연동에서 자랐고, 스물이 되어 대도시로 떠나 십여 년을 살았으나 이혼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열매와 고기를 먹으면서 우리는 뼈가 굵어졌고 살이 올랐다.
   이곳의 숙명은 간절히 떠나고 싶은 자는 다시금 돌아온다는 사실이 얼추 맞았다고 느껴졌다. 연동에서 눈사람 만들기조차 지겨울 무렵이 되면 우리의 생일이 다가왔다. 엄마는 생일 밤 제과점에서 하나 남은 케이크를 사왔다. 엄마를 기다리던 우리는 거실 불을 다 끄고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철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이 있는 케이크였다. 오래 쇼케이스에 있어서 공기가 들어간 퍽퍽한 케이크였다. 거실이 어두워지면 길고 긴 겨울이 지나갈 채비가 시작되었다. 그 다음 날에 종아리까지 오는 긴 패딩을 입고 현관문을 나서면 어깨를 힘주어 움츠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는 바람도 차갑지 않았다. 곧이어 봄이 왔고 여름 즈음에는 추위에 질린 겨울이 조금은 그리워지고는 했다.

*

   민영의 오랜 소원은 따뜻한 나라에서 생일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작년 여름부터 우리는 돌아오는 스물셋 번째 생일을 더운 나라에서 생일을 맞이하기 위해 휴가 계획을 세웠다. 휴가 내내 여름 과일을 질리도록 먹고 싶다는 민영의 말을 따라 따뜻한 나라로 골랐다. 그중에서도 망고를 원 없이 먹고 싶다는 말에 동남아로, 거기에서도 2월에 가기 좋다는 태국으로 여행지를 골랐다. 태국에서도 방콕으로 갈지 푸켓으로 갈지 고민하다가 연중 다양한 축제와 예술가의 도시라는 치앙마이의 도시 소개가 마음에 들어 치앙마이행 항공권을 끊었다.
   치킨집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숙소를 찾아보고 계획을 세웠다. 민영의 맥주잔에 생긴 물방울이 유리잔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생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민영은 여전히 노트북에 눈을 떼지 못했다. 가게 조명이 어두워 노트북 모니터 액정 불빛으로 민영이 환히 웃는 얼굴이, 특히 광대가 도드라져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치앙마이에 가서 무얼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민영이 태국에 가서 망고를 얼마나 많이 먹을지 궁금했다. 민영은 나와 달리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집에 돌아가면 장롱에서 여름옷을 살펴보고 옷을 얼마나 가져가야 할지 가늠하는 일뿐이었다. 이따 집에 돌아가서 여름옷을 꺼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태국에서 여름을 좋아하는 민영이 하자는 대로 따라다니기로 작정했다.
   민영은 태국에는 망고로 요리한 음식이 많다면서 망고 밥 이야기도 해주었다. 쌀밥에 망고를 얹어서 먹는데 거기에는 연유도 곁들어서 먹는다고. 나는 밥과 망고를 같이 먹는다는 말에 비위가 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밥과 망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연유까지 뿌려 먹으면 무슨 맛일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민영은 언니가 좋아하는 토마토 설탕 절임이 외국인에게는 별다를 게 없을 거라고 덧붙어서 말했다. 천장에서 팬이 돌아갔다. 벌써 달고 무른 과일을 많이 먹은 기분이 들어 침이 고였다. 민영은 일을 시작한 스무 살부터 여름이면 화채를 만들었다. 퇴근길에 사온 자두가 물컹해지면 자기 전에 얼음 틀에 우유를 부었다. 다음 날 아침에 민영은 다시 부엌으로 갔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사이다 한 병을 가득 붓고 우유 얼음 조각도 집어넣었다. 미리 썰어둔 과일도 그릇에 죄다 털어 넣었다. 민영은 이날 온종일 밥 대신 화채를 국자로 떠먹었다. 민영이 만든 화채는 입천장이 쓰라릴 만큼 달았다. 나는 토마토 설탕 절임을 제외하면 단 음식을 못 먹는 탓에 화채도 금방 물렸다. 화채 속 떠있는 우유 얼음만 골라 먹었다. 나중에 국그릇을 치울 때면 책상 표면이 대접을 따라 동그랗게 끈적거렸다. 그릇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얇은 민소매를 입은 민영의 흰 등이 보였다. 티브이를 보면서도 화채를 먹느라 손이 바빴다. 민영이 고개를 돌렸다.
   “이가 아파.”
   민영이 말했다. 달력을 보니 팔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름내 차갑고 단 과일을 많이 먹어서 민영은 여름이 끝날 무렵이 되면 충치가 생겼다. 다음날 우리는 치과에 갔다. 여름이 길어서 몸이 늘어지던 오후였다. 치료를 받고 치과에서 나온 민영이 입을 열었다. 한낮에 무성한 이파리를 보고 있으면 징그러운 생명력에 이상하게 안도감이 든다고. 힘들어도 쉽게 목숨을 잃지 않을 것 같아서 묘하다고. 민영은 거즈를 물고 있었다. 발음이 죄다 뭉개졌다. 산이 무서울 정도로 우거져있었다. 민영은 한낮 뙤약볕에 시든 나뭇잎이 다시 생생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울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뭉개진 발음을 흐느껴 들으면서 아까보다 더 울창해진 산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 사이에서 가을이 다가오는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 뒤로 나는 민영을 떠올릴 때마다 이가 시렸다. 충치로 고생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에 민영이 서울로 놀러 왔다. 서울에 온 김에 내 자취방에 잠시 들렸다. 민영은 까만 면바지를 벗고 짧은 치마를 바꾸어 입었다. 물티슈로 눈가 화장을 지우고 화장도 고쳤다. 민영은 전신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더니 신발장을 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민영을 지켜보았다.
   “언니 구두 좀 신을게.”
   민영은 굽이 높은 레토 힐을 꺼냈다. 발등이 구두에 살짝 튀어나왔다. 동생은 나보다 발볼이 넓었다. 구두에서 움직이는 발가락이 보였다. 발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민영은 편하지도 않을 내 신발을 언제나 탐냈다.
   나는 이따 저녁에 간호학 비대면 스터디가 있었다. 민영은 내일 돌아오겠다며 현관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스터디를 준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터디가 한참일 때 스터디원이 갑자기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뉴스 봤어요?”
   “무슨 뉴스요?”
   다들 말이 없었다. 마이크가 꺼졌다. 다들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까지 사진을 보내주던 민영에게 연락이 없었다. 동생은 문자를 읽지도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줌 창을 끄고 빠져나와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잡아 녹사평역으로 향했다. 녹사평으로 가는 택시에서 라디오 속보가 흘러나왔다. 핼러윈 밤을 맞이해서라는 말과 인재와 압사라는 단어가 번갈아 가면서 나왔다. 신호등의 불이 바뀌었다. 택시가 멈추었고 기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왜 놀러 갔느냐고. 왜 서양 문화를 따라 하다가 이 사단을 만들었느냐고. 택시 기사가 작게 분노했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밝았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거기에 동생이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

   나는 사랑하는 것에 대해 나열할 수 있는 민영에게 은근하게 질투를 하고는 했다. 분명 나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인데도 민영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민영은 낭만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 낭만에 언제나 나를 끼워주었다. 민영 덕분에 나는 내 물건에 대해서 다시금 곱씹어 볼 계기가 되었다. 물건을 오래 쓰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매력이나 환경을 생각하며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의 힘 따위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민영을 따라 했던 행동들이 어느새 나에 대해서 정체성을 부여해 주었고 그 모습에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세심한 사람이라고 칭해주었다.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인 것 같아 호감이 간다고 말해주었다.
   이때 엄마와 헤어진 아빠 소식이 떠올랐다. 십 년도 전에 바람난 아빠가 이번에 또 새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대학진학을 핑계로 집에서 아주 먼 학교로 골라 갔다. 민영은 엄마와 오래 같이 있고 싶다면서 고등학생 시절 딴 네일 자격증으로 집 근처 네일숍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언어로 재구성해 서툴게 전달할 때마다 미안하게도 나는 민영을 떠올렸다. 내 동생은 세상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어떠한 사람이 민영을 만날지 궁금했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살아갈 것 같아서 묘하게 심보가 뒤틀렸다. 연동에서 도망간 나보다 민영이 더 행복할 것 같아서 밉기도 했다.

*

   여전히 눈을 감으면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밤에 도로를 경계로 희비가 엇갈렸다. 한쪽에서는 구급차가 연달아 줄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편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크게 튼 음악에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 소리에 이따금 비명도 사라졌다. 나는 노랫소리가 아니라 구급차 불빛이 번쩍거리는 거리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날카로운 언성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어떤 사람이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생수를 얼굴에 부어주고 있었다. 정신 차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여자를 부축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여자의 뺨을 두드렸다. 정신 좀 차려보라고. 여자의 다리가 힘이 없이 늘어졌다. 맥박이 요동쳤다. 배트맨으로 분장한 사람이 쓰러진 사람의 가슴에 압박을 가했다. 나는 들썩이는 정수리를 피해 걸었다. 다리에 힘이 자꾸 빠졌다. 간호사나 의사가 있으면 도와달라는 목소리에 간혹 걸음을 멈췄다. 뒤를 보았다. 할리퀸으로 분장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어떤 여자가 할리퀸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 정신이 드느냐고 물었다. 할리퀸은 말이 없었다. 여자는 할리퀸을 눕히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숫자를 세면서 가슴을 자꾸 압박했다. 옆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가 여자 대신 다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여자는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여자와 남자는 번갈아 가면서 심폐소생술을 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자 아스팔트 바닥에 사람들이 줄지어 누워있었다. 나보다 먼저 가는 사람들이 누워있는 사람들의 양팔을 모아주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파란 무명천 끝이 살짝 들썩였다. 민영의 얼굴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누워있는 그들의 다리를 보면서 걸었다. 다리가 죄다 스물이나 스물하나나 될 것 같은 어린 종아리였다. 조금 더 걸어가니 무명천이 아니라 외투로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덮여 있었다. 나는 무수한 발 사이에서 낯익은 구두를 알아보았다. 구두 한 짝은 사라져 있었다. 쭈그려 앉아서 조심스럽게 코트 깃을 잡아들었다. 민영이었다. 누가 동생의 두 팔도 배에 가지런히 모아둔 뒤였다.
   “보호자 되시나요?”
   구급대원이었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 되어 있었다. 다른 구급대원이 들것을 들고 나타났다. 민영을 실었다. 구급대원은 계속 어디론가 전화에 돌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더니 이 주변 대학병원은 이미 가득 차서 경기도로 빠져나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민영의 다리를 보았다. 발등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남은 구두 한 쪽도 벗겨 냈다. 새끼발가락 발톱이 빠져 있었다. 민영은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졌다. 한참을 가서야 구급차가 멈췄다. 같은 곳에서 먼저 온 사람들로 병원이 어수선했다. 나는 숫자를 셌다.
   의사는 민영의 상태를 살피고 사망진단을 내렸다. 퇴원 절차를 밟으러 로비로 나왔다. 직원이 잠깐 기다려달라는 말을 듣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을 세면서 병원 주차장으로 갔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수화기 너머 엄마 편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말라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 냄새가 났다. 조만간 날이 추워질 모양이었다.

*

   그 시간이 지나고 주변에 임시 분향소 천막이 생겼다. 학교 후문에서 어묵 꼬치를 사 먹다가 사장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학교에서도 네 명이나 죽었대. 똑똑한 애들 죽어서 어째. 애 다 키워놓고 부모는 불쌍해서 어떡해. 나는 어묵 꼬치를 더 먹으려고 했다가 돌아서 나왔다. 그 돈을 들고 눈에 보이는 가까운 약국에 들어갔다. 소화제를 샀다. 약을 먹고 소화할 겸 학교로 걸어갔다. 걸음 수를 셌다. 자꾸 십칠에서 십팔로 넘어갈 때마다 그다음 숫자를 헷갈렸다. 나는 소화제를 들고 천막 근처를 얼쩡거렸다. 역 근처에도 아침까지는 보지 못했던 임시 분향소가 생겼다. 방문객 이름이 아직 많지 않았다. 분향소로 들어가 국화를 올려두고 향을 피웠다. 고개를 들었다. 분향소에는 사진은커녕 이름도 없었다. 나는 민영을 떠올리면서 기도했다. 오후 수업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임시 분향소에서 나와 다시 학교로 향했다. 교정에 도착하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임시 분향소가 생겼다. 거기에는 네 명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있었다. 아까 분식집 사장님이 하던 말이 떠올라 멀리서 학생들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들은 장례식장 근처에도 안 가보았을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분향소에 왔는지 자신들끼리 눈치 보며 국화를 단상에 올렸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하다가 뒤돌아 나왔다. 분향소를 지켜보다가 오후 수업을 그만 깜빡해 버렸다. 국화도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소화제 병을 건져 버렸다. 내 또래 학생들은 거기 왜 갔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외투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바닥에서 찬기가 올라왔다.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무거워 쉽게 열리지 않아 보였다.

*

   나는 민영의 장례식이 끝나고 바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연동에서 엄마와 둘이 마주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엄마에게 학교 수업은 들어야 졸업할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엄마가 자동차로 운전해 네 시간 걸리는 거리를 여섯 시간에 걸쳐 서울의 자취방에 왔다.

*

   서울로 돌아와 나는 방에 숨어있었다. 창살로 들어오는 햇빛과 시간마다 길어지는 그림자 길이를 가늠하면서 대부분 시간을 죽였다. 지루해지면 눈을 감았다. 그럴 때마다 대다수 금방 잠들었지만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릴 때도 있었다. 엄마가 온 날에도 잠들지 못하고 연신 자세를 바꾸던 참이었다. 도어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방이 환해졌다. 엄마가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이제야 공기가 좀 통하네.”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나를 일으켜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엄마는 나를 변기에 앉혔다.
   “어젯밤 유튜브에서 봤는데 우울은 수용성이라서 물에 씻겨 내려간대.”
   엄마가 칫솔에 치약을 묻히면서 말했다.
   “그래서 온 거야?”
   “어젯밤에 해봤는데 효과가 있더라고.”
   엄마가 내 턱을 당기면서 말했다. 엄마는 칫솔을 깊숙이 넣어 안쪽 어금니부터 천천히 닦아 주었다. 자꾸 침이 고였다. 침 때문이라도 엄마는 내가 말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화장실이 좁아서 무릎에 엄마의 종아리가 자꾸 닿았다. 엄마는 양치 컵도 내 입술에 가져다주었다. 나는 물을 머금었다가 변기 밑으로 뱉어냈다. 엄마는 연거푸 컵을 입에 대주고 샤워기로 바닥을 쓸었다. 치약 거품이 물줄기를 타고 하수구로 밑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샤워기를 끄고 팔을 위로 드는 시늉을 보였다. 엄마를 따라 손을 높이 올렸다. 엄마는 내 옷을 들쳐서 벗겨 냈다. 바지도 잡아당겨 벗기고 팬티도 벗겨 내었다. 엄마는 문을 살짝 열어 옷가지를 던졌다.
   그사이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엄마는 화장실 문을 닫고 바짓단을 무릎까지 접어 올렸다. 엄마는 세면대의 샤워기를 들었다. 물줄기에서 김이 나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름이 따뜻한 물에 사라졌다. 엄마는 샤워기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샤워기를 가슴에 댔다. 물이 피부에 닿으니 엄마의 말대로 무언가가 흘러내려 가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었다. 거품이 잔뜩 일어났다. 목을 시작해 어깨, 허리, 사타구니를 손으로 박박 닦아주었다. 엄마가 내 팔뚝을 들어 겨드랑이와 가슴까지 구석구석 밀었다. 거품이 흩어지자 엄마는 다시 비누를 들고 거품을 냈다. 그리고 나를 변기에서 일으켰다. 엄마는 쭈그리고 앉아 허벅지와 종아리, 복사뼈까지 손으로 문질렀다.
   “몸이 왜 이리 반 토막이 났어.”
   엄마는 어릴 적처럼 코에 손을 대어주며 말했다. 나는 킁, 하고 코를 풀었다. 엄마는 콧물을 샤워기로 씻어 내리고 다시 눈과 입가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오랜만에 씻으니까 엄마 말대로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너 우니?”
   엄마가 얼굴을 닦아주다가 물었다.
   “따가워서
   엄마는 다시 코에 손을 댔다.
   “따가우면 눈물 나지.”
   나는 또 한 번 코를 풀었다.
   "내가 울면 민영이도 따라 울었는데.”
   엄마는 말이 없었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가에 손을 대면 주체할 새 없이 흐를 것 같아서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엄마는 머리까지 감겨준 뒤에 수건으로 물기를 훔쳐 주었다. 다시 나를 방으로 데리고 와 책상 의자에 앉혔다. 엄마는 손바닥에 로션을 짰다. 거울을 보니 코끝이 빨갰다. 엄마는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었다.
   “어째 씻겨놨는데 더 못생겨졌지.”
   엄마는 로션 뚜껑을 닫으면서 말했다. 민영은 항상 예뻤는데. 밤에 같이 라면을 먹고 자도 나는 코가 붓고 손가락도 퉁퉁 부었는데 민영은 하나도 붓지 않았다.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다가 못생겼다는 말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못생겼다고 하니까 참을 수 없었다. 있지도 않은 민영에게 진 것 같았다. 엄마는 내 종아리에 보디로션을 발라주다가 일어나서 서랍장에서 드라이기를 꺼냈다. 드라이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우는 소리가 묻혔다. 엄마는 머리카락 끝까지 정성스럽게 말려주었다. 끅끅거리면서 눈물을 참을 때보다 엉엉 우니까 부끄러워도 속이 시원했다. 엄마는 드라이기를 끄고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는 우유를 건네주었다. 우유 입구에는 빨대도 꽂혀 있었다. 민영은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유를 좋아하지 않아도 여름에는 우유를 모아서 얼렸다.
   여름은 민영이 우유를 마시게 할 만큼 활력을 주는 계절이었다. 엄마는 일이 끝나고 매번 작은 우유를 두 팩씩 사왔다. 민영이 마시지 않는 사실을 알아도 두 팩을 사왔고 민영은 내게 자신 몫 우유를 몰래 내밀었다. 엄마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다 마셔도 모른 척해주었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우유가 있을 자리가 허전하다면 나는 그때야 여름이 왔다고 실감했다. 냉장고에 우유가 없어도 아쉽지 않았다. 원래대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찾아간 것이었으니까. 날이 추워지면 민영은 다시 우유를 마시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여름이 당도하기도 전에 슬그머니 가을을 기다렸다.
   나는 허기에 우유를 단숨에 마셨다. 빨대를 하도 빨아서 팩에서 공기 소리가 들릴 때가 되어서야 내려놓았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내고 우유를 마시니까 나른해졌다. 아까 엄마가 한 말이 사실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빈 우유갑을 보니 다시 눈물이 고였다. 엄마가 작은 탁상에 밥을 차려주었다. 계란찜이 있었다. 의자에 내려와 왔다. 엄마가 전자레인지에 데운 밥을 떴다. 밥알이 달았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니 기운이 났다. 나는 정신없게 밥그릇을 비웠다. 엄마는 국그릇을 들어 국물만 마셨다. 건더기를 먹지 않고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펼쳤다. 내 옷을 담았다. 엄마는 이제 가자고 말했다.
   “학교에 너 며칠 안 보인다고 해도 큰일 안 나.”
   엄마가 캐리어를 들고 자취방을 나오면서 말했다. 엄마는 내가 사는 다세대 주택 앞에 모닝을 주차해두었다. 우리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엄마는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대에 바짝 붙어 있었다. 핸들에 엄마의 어깨가 닿을 것 같았다. 집에서부터 여섯 시간 동안 왔을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엄마는 운전을 무서워했다. 집에서 마트까지 걸어가면 이십오 분 걸리는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가면 오 분 정도 걸렸다. 엄마는 이혼 후 일을 시작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모닝을 중고로 샀다. 집에서 마트 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결혼하기 전에 땄던 운전면허를 이십여 년 만에 써먹을 수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제일 잘한 일이 뭔지 알아?”
   엄마는 동네를 빠져나오면서 말했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뭔데.”
   “운전 배운 거야.”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말을 이었다.
   “무서워도 배워두니까 나중에라도 요긴하게 쓰이잖아. 너도 무서워도 뭐라도 계속해야 해. 언젠가는 쓰여.”
   엄마는 민영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엄마가 다시 말을 뗐다.
   “하지만 쉴 때도 있어야 해.”
   고개를 차창으로 돌렸다. 청계천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조금 더 지나가 우리는 성수대교로 들어섰다. 옆 차선으로 중형 승용차가 지나가기만 해도 모닝이 흔들거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가슴을 운전대 더 가까이 대었다. 앞서 가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붉게 들어왔다. 엄마도 앞차를 따라 속도를 줄었다.
   “민경아 그때는 민영이 때문에 운전할 생각도 못 했어. 이제 하나 남은 딸도 말라서 죽게 생겼는데 엄마가 뭐라도 해야지.”
   우리는 서울에서 집까지 휴게소를 세 번이나 들렸다. 처음 들린 곳에서는 커피 두 잔을 샀고 두 번째 휴게소에서는 밥을 먹었다. 마지막 휴게소에서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집으로 다시 출발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연동에 도착했다. 엄마는 먼저 잔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을 나가야 했다. 나는 친구들이 부모가 출근했다거나 퇴근했다는 말이 낯설었다. 엄마는 일을 나가거나 돌아왔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마트에서 나흘 동안 계산대에서 일하면 엄마는 하루 쉴 수 있었다. 그 하루를 나를 위해 서울로 왔다.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있으니 집에 왔다고 느껴졌다.
   다음 날 느지막하게 일어나니 식탁에 밥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식탁보를 접어 두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엄마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집을 치웠다. 테이블에 있는 각 티슈 화장지조차 말끔히 접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누워도 자취방 말고 집에서 자라고 말했다. 집에서 누워서 엄마 오면 왔느냐고 인사만 해도 된다고. 아니면 인사를 안 해도 되니까 옆에 있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그러고는 쉬는 날에 엄마와 함께 놀자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는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왔다. 나는 현관에서 엄마가 들고 있는 빨래 바구니를 받았다. 거실 창살로 햇살이 기다랗게 들어왔다. 햇살 가운데로 엄마가 앉았다. 엄마는 빨래를 개면서 내가 듣든 말든 상관없이 엄마는 여행에 가기로 했으니까 마음 편히 즐기다가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달력을 보았다. 다음 달에 우리 생일이 있었다. 민영이 죽은 지 석 달이 되어갔다. 빨래를 갤 때마다 엄마의 등이 조금씩 들썩였다. 엄마는 눈물을 삼키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민경아, 따뜻한 빛을 받으면 기분이 나아진대. 가서 동생 소원도 빌어주고.”
   엄마는 지금 기분이 나아지고 있어? 라는 물음이 턱 끝까지 넘어왔다. 거실로 들어온 햇빛이 부엌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서 말을 삼켜냈다. 그 대신 다른 말을 골랐다.
   “같이 가.”
   엄마가 빨래를 들고 일어났다.
   “엄마는 일해야지.”
   엄마는 빨래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빨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굳게 닫았다. 빨래를 책상에 올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거실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 너머로 청소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엄마는 다시 일하러 간다고 말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 민영의 방문에 섰다. 나는 문고리를 천천히 돌려 민영의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이불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방바닥도 환했다. 엄마는 매일같이 민영의 방을 쓸고 닦는 모양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메일함에 들어갔다. 민영이 엑셀로 짠 치앙마이 여행 일정표가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눈을 감았다.

*

   “언니는 치앙마이에서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때 술집에서 민영이 여행 계획을 세우다가 물었다. 나는 빈 맥주잔을 보다가 민영을 바라보았다. 민영이 재차 물었다.
   “하고 싶은 거 있냐고.”
   천장에서 팬이 힘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태국에서 유명한 건 뭐야?”
   민영은 고개를 왼쪽으로 까닥 돌리더니 말했다.
   “언니 사찰 좋아하잖아. 치앙마이는 사원이 많아서 무작정 걷기만 하더라도 사원이 보인대.”
   “산책하면서 사원 구경해야겠네.”
   민영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민영은 무언가를 더 찾더니 노트북을 내 쪽으로 돌렸다.
   “언니 사원 투어도 있어.”
   민영이 손가락으로 노트북 모니터 속 왓우몽과 도이수텝 야간 투어를 가리켰다.
   “밤에 가면 치앙마이 야경도 볼 수 있대. 언니 야경 좋아하잖아.”
   나는 민영의 맥주잔을 들었다.
   “좋은 거 같아.”
   “보지도 않고?”
   민영은 나를 보면서 추궁했다. 나는 엄지를 들어 올리면서 정말이라고 말했다. 민영은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그럼 여기 예약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후기가 많다면서. 나는 민영의 맥주를 마시면서 알겠다고 말했다. 민영의 맥주가 미지근하게 식었다. 나는 오징어를 씹으면서 사원 투어를 결제하는 민영을 보았다.

*

   내가 사찰을 좋아했나. 다시 눈을 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울타리 너머로 휴작하는 밭이 보였다. 엄마는 이혼하고 연동에 온 무렵부터 절에 자주 갔다. 엄마는 주말마다 절에 가서 밥을 먹고 108배를 했다. 나는 절의 향냄새가 좋아서 108배를 하는 엄마 곁을 지켰다. 엄마는 절하기에 앞서 나에게 방석을 내어주었다. 짙은 회색 방석은 낡고 푹신했다. 여름에는 마루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이 시원해서 절에 오느라 올라온 열기를 식히기 충분했다. 겨울엔 방석과 함께 목도리를 내 목에 매주었다. 엄마는 절하면 몸이 더워진다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 엄마의 손끝이 차가웠다. 나는 방석에 앉아 절하는 엄마를 보다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민영은 재미없다면서 처음에만 절에 따라왔다가 그다음에는 집에 있었다. 나는 중간에 잠들어도 절에 가는 엄마를 따라가 같이 밥 먹고 기도하는 엄마를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엄마는 민영이 몰래 핫도그도 사주었다. 엄마는 그때마다 민영에게는 비밀이라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핫도그의 케첩을 핥아 먹다가 비장하게 엄마와 손가락을 걸었다. 핫도그를 다 먹고 나서 휴지로 입을 닦고 손을 싹싹 턴 다음에 집으로 들어갔다. 민영이 영문도 모른 채 우리를 맞이해 줄 때마다 엄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엄마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엄마와 민영에게도 둘만의 비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엄마가 민영이 소원을 대신 빌어주고 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영은 무슨 소원을 빌려고 했을지 궁금했다.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들어왔다. 담장 너머 빈 밭을 보았다. 여기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인삼을 키웠다. 지난봄에 인삼밭 아저씨가 삼을 캤다고 들었다. 그때 전화로 민영이 요즘 인삼을 갈아 마신다고 전해주었다. 담장 너머 인삼밭 아저씨가 농약이 날린 적이 많아 죄송했다고, 아무 말씀 안 해줘서 고맙다며 캐고 남은 인삼을 주었다고 전해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민영이 아침마다 우유에 인삼을 넣어 믹서기에 갈아 마시는 등이 그려졌다. 엄마와 인삼을 갈아 나눠 마시면 왠지 건강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민영은 뜸들이다가 그때 언니의 우유도 슬쩍했다고 멋쩍게 털어놓았다. 그때도 엄마는 여전히 우유를 두 팩씩 사온 모양이었다. 수화기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민영이 말을 꺼냈다. 나중에 언니가 집에 오면 인삼을 맛있게 갈아주겠다고 말했다.
   “약속이다.”
   내가 말했다. 민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작은 인삼은 내년에 마당에 심으려고 따로 남겨두었다고 말해주었다. 민영은 자신도 엄마 옆에서 토마토 모종을 심을 거라고도 말했다. 나도 말을 보탰다. 인삼과 토마토를 택배로 보내달라고. 민영은 알겠다고 말했다. 내년 여름에 토마토를 보내줄 테니 기대하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때 설탕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름내 설탕에 절인 토마토를 아침마다 꺼내먹으면서 학교에 갈 생각에 처음으로 여름이 기다려졌다.
   문득 치앙마이에서 먹기로 한 망고 밥이 궁금해졌다. 많이들 먹으니까 길거리에서도 파는 게 아닐지 하는 궁금증이었다. 망고의 단맛과 부드러움이 쌀밥과 만나서 더욱더 달아질 것 같았다. 연유도 다니까 어쩌면 설탕에 버무려 먹는 토마토처럼 별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침이 돌았다. 태국에서 망고 밥을 먹고 나서 연동에 돌아오면 그때 시장에서 토마토 모종과 수박 모종을 구해 마당에 심어보고 싶었다.
   창문을 닫고 서울에서 가지고 온 캐리어를 찾았다. 가방을 비우고 장롱을 열어 보았다. 거기서 여름옷을 꺼냈다. 작년에 줄기차게 입던 원피스와 옷가지를 찾아 캐리어에 넣었다. 연동에 오래 남고 싶었던 민영이 우리 중에서 먼저 이곳을 떠났다. 연동은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지 못하게 하고 남고 싶은 자는 떠나버리게 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민영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다만 민영의 소원을 짐작해 볼 뿐이었다. 내 소원도 역시 알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무슨 소원을 빌지 여전히 막연할 뿐이었다. 사원을 거닐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눈에 담고 싶었다. 캐리어를 챙긴 다음 여권을 찾기 시작했다. 내일은 환전하러 은행에 갈 것이었다. 연동으로 돌아온 뒤 첫 외출이었다.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오늘도 기억하기 위해 씁니다
 작년 가을에는 뉴스를 오래 보았습니다. 추워지던 계절에 무력함을 느끼며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주먹을 쥐고는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는 언어와 문장이 있었고, 기억하기 위해 「물이 있는 자리」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쓰다가 멈추고 쓰다가 멈추던 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 소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오랫동안 고민도 해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어서 문학을 한다는 작은 신념으로 다시 책상에 앉았고 친구들과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써보자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탈고한 뒤 이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라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 소설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의원님들과 존경하는 한양여대 선생님들,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희희동산, 힘이 되어준 소설 스터디 학모등하, 함께 나아가는 전공심화 동기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신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자신의 아픔과 마주하는 소설의 시선
 이번 해 김용문학상 소설 부문에는 예년에 비해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평소에 10편 중·후반 대의 투고작이 23편으로 증가했다. 많은 투고작이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문학은 언제나 시대의 상처와 균열을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태도를 지니지만, 올해는 유독 그 아픔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몇 년 전에는 판타지와 SF 그리고 추리물과 같은 장르 문법에 근거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작품들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일상이라는 현실적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고통의 순간 그리고 이에 대한 극복을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성취가 인간 개개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서, 반려동물과의 관계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개인의 상처를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그 회복을 다짐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과 같았다. 3인칭 인물이 표면적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의 상황에 대한 소설적 거리감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 중에서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허구적 거리감을 통해 개인의 상처를 더 넓은 시선으로 깊이 있게 파고든 작품들로 본심을 진행하였다. 그중 5편의 작품이 최종까지 올라갔다. 「꽃은 잎을 잊는다」는 직업 세계에서 지친 두 남녀가 만나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체는 좋았지만 서사가 약간 전형적으로 구성된 것 같은 느낌이 아쉬웠다. 「힘들 때 쉬세요」는 현역에서 밀려난 깡패들이 속초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그린 작품이다. 진지할수록 웃겨지는 코미디처럼 허구의 세계를 흥미롭게 잘 구성하였으나 이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의 무게감이 약하다고 느껴졌다.
 「손가락의 형태」는 농구를 하는 주인공이 코치로부터 반칙과 폭력을 종용받으면서 생기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조연배우 엄마, 만년 3위 반칙왕 복싱선수 아버지, 그리고 이들이 사는 반지하 공간 등은 비주류의 삶을 잘 형상화하고 있었다. 비록 생활의 루저이지만, 반칙을 포기하고 패배를 감수하면서 진정한 복서로서 명예를 회복하는 아버지의 동영상을 보는 장면은 모든 비주류에 대한 응원과 다짐이 담겨있어 감동적이었다. 「우는 연습」은 연극을 하는 삼촌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글이다. 언제나 격무에 시달리지만 여전히 가난한 생계를 이어가는 엄마와 삼촌의 암 검사 등을 둘러싼 풍경 묘사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염려, 희망 등의 감정적 기미들이 잘 스며들어 있었다. 이야기는 작지만, 과장이나 허풍 없이 이십 대 청년의 감성을 솔직하게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물이 있는 자리」는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쌍둥이 동생 민영을 애도하는 언니와 엄마의 일상이 절제된 문체로 그려진 작품이다. 동생 민영을 잃은 가족의 절망과 중단된 일상, 그리고 민영을 회상하는 장면 곳곳에 애잔한 슬픔과 그리움이 잘 녹아있었다. 민영의 버킷리스트였던 치앙마이의 사원을 향한 민경의 여정 또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일상의 회복을 암시하고 있었다. 최근 한국 사회가 겪은 참상에 대한 애도를 문학적 승화한 작품이었다. 고민 끝에, 개인의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나의 문제를 사회에 대한 시선으로 확장 시키는 동시에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일상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선을 확보한 「물이 있는 자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 속에서 엄마가 다 큰 딸을 씻기며 함께 슬픔을 겪어내는 것처럼, 이 작품이 그리고 앞으로의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 씻김굿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이주라(문화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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