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이역인 '춘포역'에 다녀왔다. 춘포의 옛 이름은 '봄개'다. 봄이 드나드는 물가라는 뜻이다. 만경강 지류가 리(里)를 제외한 면(面) 대부분에 흐른다. 그 물줄기를 따라 넓은 평야를 이루는 곳이 있다. 만경강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제공했고 그 물을 머금은 곡식이 흉년을 모르고 익어간 때가 있었다.
   일제가 이곳을 침략한 후 주변에 펼쳐진 너른 지역을 농경지로 활용하여 쌀 생산을 높인 일본은 더 많은 식량을 수탈해가기 시작했다. 제방공사를 하고 농업시험연구기관을 설치하여 수량 증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수리조합을 설치하여 농업생산기반을 구축한 것도 착취를 위해서였다.
 일본은 수탈한 쌀을 운송하기 위해 1914년 대장촌역(현 춘포역)을 지어 쌀을 군산항으로 옮겼다. 1996년에 역명이 대장에서 춘포로 변경됐고 2004년에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됐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춘포역은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로 소규모 철도역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역사적,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 210호로 지정됐으나 2011년에 폐역됐다.
 춘포역은 익산시 춘포면 덕실리 50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익산문화재단에서는 역사를 간직한 춘포역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다. 기자는 생생하고 전달력 있는 현장 체험을 위해 일일 물장수 역할로 자원봉사를 했다. 옛 시절의 춘포역이 그립고 궁금해 찾은 시민들에게 옛날과 비슷한 향기를 풍기기 위해 물장수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지게를 짊어졌다. 기자는 지게 양쪽에 짊어진 양동이에 생수를 넣고 다니며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다. 60년 전만 해도 춘포역 물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물장수는 큰 양동이에 물을 담아 한 동이씩 물을 팔았다. 기차가 역에 정차하면 창문으로 돈을 받고 물을 팔았다고 한다. 물장수는 낮에는 엿 장사를 하고 저녁엔 물을 한 동이씩 들고 열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기차 문을 열고 "물이요! 물이요!" 하고 소리치면서 물을 팔았을 물장수를 상상하며 기자는 시민들에게 생수를 나눠줬다. 초등학교에서 견학 온 학생들은 가족과 함께 물장수와 사진찍기 과제를 하기 위해 기자에게 계속해서 사진촬영을 요구했다. 생수를 무료로 나누며 가족들과 사진도 함께 찍어주니 뜻 깊은 시간이 된 것 같아 보람찼다. 시민들에게 정답게 다가가며 물을 나눠 준 덕인지 엿장수가 찾아왔다. 얻어 마신 생수에 보답하겠다고 엿을 나눠주러 온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후 춘포역 앞에는 좌판이 들어섰다고 한다.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어 장사하기에 좋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이리(현 익산)에서 엿을 받아와 비포장도로를 걸어다니며 팔았는데 손님이 없을 땐 엿치기나 구슬치기 등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춘포역은 동네 어른이나 아이들의 놀이터인 셈이었다.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역 앞에서는 공기놀이나 기념 스탬프 제작 같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체험을 마치고 받은 쿠폰으로 달고나 설탕과자를 만들거나 군것질 식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코너는 남녀노소가 몰려 큰 성황을 이뤘다. 역 밖에는 방문자의 추억을 위한 포토존 및 조형작품이 있고 당시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있어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역 내부에는 전시물 디스플레이 공간 및 체험학습 공간을 조성하여 역사를 알수 있게 했으며 당시 사람들의 물건도 관람할 수 있었다. 역장에게 티켓을 받아 내부를 지나면 뒤편에는 공연장이 마련돼 있었다. '동촌서커스', '소설가 박인선 씨 만남', '현장포럼 공감'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일본 순사복을 입고 몽둥이를 든 순사들이 백성들을 구타·가혹하며 쌀을 옮기게 했다. 빨리 빨리 옮기라고 소리치는 순사의 목소리에 놀란 방문자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거지와 물장수 역할을 맡은 백성이 쌀을 힘들게 옮겨놓으면 시민도 참여 가능한 놀이가 시작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하며 대한의 청년들이 일본 순사 몰래 쌀을 다시 가져오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일제에 수탈 당한 쌀을 되찾기 위해 학생들은 진지하게 게임에 참여했다.
 춘포역이 본래 대장역이라 불린 이유는 비옥한 곡창지대인 춘포 일대를 일본인들이 '넓은 들'이라는 뜻의 '대장촌'으로 불러서이다. 역은 철도 부설에 의해 지역 중심지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세워졌고 주변에 신시가지가 조성됐다. 이는 조선인 중심의 전통적인 시가지를 대신하는 중심 시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신시가지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가는 창구였다. 일본 세력이 침투해 오는 입구이자 조선인이 일본에 의해 근대 문명을 접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으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철도 연선을 따라 거주지를 마련했고 그렇게 역전은 조선인들에게 낯선 장소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와 살았기 때문이다.
 한때 춘포초등학교 학생들이 1천800여 명이었을 정도로 춘포는 큰 시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장역을 이용하기 위해 몰려와 역전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는데 그 수가 한 번 모이면 수백 명으로 까마귀 떼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등교하기 위해 검정 학생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가 끝나면 또다시 역에 몰려와 기차를 이용했다. 지금은 이용하는 승객이 없어 무인 승차역이 됐다.
 재밌는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일곱 살 아이가 여수로 생선 사러 나가는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어 몰래 기차에 탔다고 한다. 전주쯤에 가서 어머니가 타고 있는 칸으로 갔더니 어머니가 기절할뻔했다는데, 야단치면서도 한편으론 반가워하는 어머니 덕에 아이는 몰래 여수까지 갔다가 맛있는 것을 얻어먹는 등 잘 먹고 따라다녔다고 한다. 어머니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보다 맛있는 군것질을 할 생각에 이후에도 어머니 몰래 기차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청춘들의 낭만적인 이야기도 있다. 통학열차는 기차를 이용하여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평소 접하기 힘든 이성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공간이었다. 남녀 학생들은 한 공간에서 만나 일정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남몰래 짝사랑을 키우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남학생들도 지금 학생들처럼 여학생을 바라만 보고 속앓이만 했다는 가슴 아픈 얘기도 있었다.
 익산은 마한·백제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익산을 우리 역사에서 고대 문화의 중심지로만 국한하여 문화를 논하기엔 부족하다. 중-근세의 역사, 근-현대의 역사 비중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일제강점기 군산으로 가는 철도-도로의 관문, 호남 수탈의 전초기지였던 익산의 역사성은 조명을 덜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화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기회에 역사(驛舍)를 통해 역사(歷史)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 물장수 역할을 맡은 기자가 시민들에게 물을 나눠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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