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에 위치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진행된 1천 167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다녀왔다.   /편집자
 
▲ 위안부 할머니와 시위 참가자들
 지난달 25일 기자는 1천 167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했다. 수요 시위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주최하는데, 이번 수요시위는 수원 매원교회 민진영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이 자리에는 평화나비, 원주 삼육고, 울산 삼호중, 대구 소꽃이(소녀와 꽃 그리고 이야기)등 많은 단체들이 참가했다.
 이번 수요시위는 3·1절을 앞두고 열려 더욱 의미가 깊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에 의해 고통받으셨던 할머니들을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을 보는 순간, 가슴 한편으로 늦게 찾아와 죄송스럽다는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또 그분들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받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에 분개를 느꼈다.
 
▲ 시위에 참가한 초등학생들
 시위는 울산 삼호중 학생들의 노랫소리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주현 목사의 인사말과 경과보고가 이어졌다. 올해 개봉 예정작인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을 제작한 조광래 감독도 현장에 참가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게 기부금을 전달받았다. 영화 <귀향>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어 일본과의 외교 갈등 우려로 인해 국내 개봉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자, 기부금으로 개봉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기부금 전달식이 끝나고 문방순 시인의 추모시 낭독이 있었다. 지난 1월 26일과 31일에 눈을 감은 위안부 할머니 두 분을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의 자유 발언이 뒤이어 따랐고 평화나비 단체의 노래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성명서 낭독으로 행사가 마무리됐다. 시위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든 피켓, 한복을 입고 온 여고생, 앞뒤로 피켓을 차고 온 아저씨, 외국인 참가자 등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곁에서 힘을 모아 주고 있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 없는 현장에서 다 같이 한뜻으로 외치는 모습이 기자에게 많은 감동을 줬다. 어느새 기자도 동화되었는지, 대놓고 소리치지는 못해도 입 모양으로 그들의 말을 따라하게 되었다. 
 현장의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한마디의 위로보다 더욱 소중한 의미일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1시간 가량의 시위가 끝난 후 사람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다행히도 날씨가 쌀쌀하지 않아 할머니들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UN등 인권기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명백한 전쟁범죄로 규정했다고 한다. 즉 위안부 범죄는 국제법상 불법이며 따라서 일본은 적법한 배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배상은 커녕 공식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은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에서 출연한 기금이다. 그 돈의 일부는 일본정부 측에서 지불하지만 주로 일본국민들의 성금을 통해서 돈을 마련한다. 일본이 직접적으로 배상을 하지 않고 사설 단체를 통해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 측은 사죄를 하지 않고도 사죄를 한 듯 행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 기금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얀 러프 오헤른씨는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일부 기업에서 나온 돈으로 위안부 여성들에게 지급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일본군 위안부 사건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군들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 점령국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성노예로 삼은 일이다. 하지만 위안부라는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위안부라는 단어 안에는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쓰든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서, 또는 일자리를 주겠다는 거짓말에 회유당해 몇 년간 타지에서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측의 진정한 사과와 적법한 배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달 4일 일본은 1940년대 당시 물가로 계산해서 2천 원도 안 되는 돈을 임금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께 더 큰 상처와 모욕감을 준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일본 정부가 임금을 지급한 사실은 일본이 강제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동원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뵙고 시위에 참석했을 때 기자는 마음의 짐을 덜어 놓은 느낌이 들었다. 늦었지만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기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분들의 고생으로 인해 내가 지금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함이 느껴지고 그 고통을 그분들만 안고 살아가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까지 밀려왔다. 기자는 수요시위에 처음 참가했다. 평소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학교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가는 것을 미뤄 왔다. 그래서 이번 방학에는 꼭 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시위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처럼 기자도 피켓을 들고 같이 시위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한 컷이라도 사진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사진을 찍으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무엇을 주장하는지 느껴졌다. 
 
▲ 한복을 입혀놓은 소녀상
 굳게 닫히고 블라인드로 가려진 일본대사관의 창문과 반대편 건물에서 창문을 열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소한 소통조차도 거부하려는 일본의 속셈은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상도 굳은 표정으로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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