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원하는 것 역시 약간의 물과 몇 마디의 인사, 그리고 달에 관한 약간의 논쟁 정도였으니, 그녀는 내게 커다란 부담을 주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공주들이 달에 수없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짜르 왕조의 몰락기 때 달의 뒤편이 러시아 공주들로 꽉 들어차 버렸다고까지 말했으니 어지간한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러시아 출신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대충’ 믿기로 결심했다. 확실히 공기도 물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 살고 있어야 한다면 선인장 같은 것들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대부분의 왕조가 몰락할 때 몇몇의 공주들은 신비로운 사건에 휘말리거나, 마법에 걸려 버리는 것은 정말 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딱딱한 말투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그녀는 ‘ㄿ 발음을 강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각별한, 각박한’ 이런 단어들이 특별히 강조되게 마련이었다) 다시 공주로 변할 수 있다면 선인장이라는 별명도 꽤나 잘 어울릴 법 했다.
심각하게 추운 어느 겨울에 그녀는 마법에서 풀려나 공주가 되었다. 그 때는 달에 관한 논쟁도 거의 수그러들 무렵이었으며, 바이에슬론의 채점 방식이 바뀌어 나는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 할 시점이었다.
(나는 사격에 매우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협회에서는 사격의 배점을 혁신적으로 높여 놓았다) 그녀는 어쩐지 날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강하게 ‘ㄿ을 발음하는 습관도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몸에 가시가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매우 정교한 스텝으로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뒤로 밀어내는 신기를 매일 선보였다. 달에서 온 공주가 출 수 있는 춤 치고는 이름도 그 동작도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서야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인장에서 공주로 변해 있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물었다.
아나스타샤. 이것이 선인장에서 공주로 변신한 그녀의 이름이었다. 러시아 마지막 짜르 로마노프 2세의 딸. 디즈니 만화의 주인공. 그리고 문라이트를 완벽히 소화해 내는 러시아의 공주.
그녀는 꽤나 오랫동안 선인장으로 살아 왔으며, 달 뒤편의 혹독한 추위와 싸워왔다.(모두들 아시다시피, 달의 뒤편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춥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놀랍도록 차갑고 아름다운 기술 문라이트를 가지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서 덕 민 (문예창작학과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