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에드워드 사이드의『오리엔탈리즘』은 탈식민주의의 '시작'을 알린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의 서구 비평가들에게 사이드는 탈식민성 논쟁의 출발점이며, 『오리엔탈리즘』은 인종 문제를 성과 계급에 버금가는 심급으로 부각시킨 최초의 텍스트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좀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탈식민주의 역사에서 사이드의 작업이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탈식민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세례를 받은『오리엔탈리즘』을 탈식민주의의 효시로 규정함으로써 탈식민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오리엔탈리즘』은 탈식민주의의 출발점인가 전환점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범박하게 얘기하면, 탈식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제3세계의 반식민적 민족주의와 탈구조주의 해체론에 근거한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나 빚어낸 혼종 이론이다. 오늘의 탈식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가 조우하고 경합하는 장이며, 동시에 그러한 혼종성에서 비롯되는 내적 긴장과 모순을 (신)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전략으로 활용하는 담론적 실천이다. 그런데『오리엔탈리즘』을 탈식민주의의 '시작'으로 규정하는 것은 탈식민주의의 반쪽만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탈식민주의의 통시적 지형도에서 과거는 지워버리고 현재만 얘기하려는 것이다. 즉 식민지 독립 이전부터 전개되어온 제3세계의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반식민주의 운동을 탈식민주의 계보학에서 삭제하고 그 자리를 유럽 '고급 이론'과 미국 출판자본이 합작하여 만든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비평이론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오리엔탈리즘』의 계보학적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제3세계적 입장에서 볼 때,『오리엔탈리즘』을 탈식민주의의 '시작'으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오류인 동시에 전략적 실수다. 이는『오리엔탈리즘』이전에 오랫동안 '야생' 상태로 자라왔던 탈식민주의의 '뿌리'를 잘라내어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온실'로 이식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서구 식민주의에 맞섰던 제3세계는 저항주체로서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탈식민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우산 속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한 서구의 담론적 전략 이면에는 교묘한 형태의 서구중심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즉 정교하고 난해한 이론적 작업은 서구의 몫이고 제3세계는 그 작업을 위한 배경과 재료를 제공할 뿐이라는 시각이다. 이는 '신대륙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를 콜럼버스의 발길을 기다려 온 미답의 땅으로 간주했던 식민주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탈식민주의가 해체론의 이론적 실험장 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류라는 평가를 받거나 심지어 신식민주의의 문화적 첨병이라는 비판을 듣는 원인 중의 하나도 그러한 서구의 논리와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의 역사는『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되기 훨씬 이전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비록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19세기 말부터 대두한 흑인민족주의를 필두로 20세기 초중반에 범아프리카주의, 네그리튀드,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의 민족문학, 미국의 할렘르네상스, 영연방문학 등이 백인우월주의와 유럽중심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탈식민주의를 서구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담론이라고 규정할 때, 이와 같은 다양하고 유구한 담론적 실천은 분명 탈식민주의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처럼 식민지 역사를 경험한 '주변부'의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 전통에 서구 이론과 자본이 개입하면서 '중심부'의 제도권 아카데미로 진입한 것이 바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며, 여기에는 사이드처럼 서구에서 활동하는 제3세계 출신의 이민 지식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오리엔탈리즘』은 바로 이러한 탈식민주의의 전환점을 알리는 이정표다. 또한『오리엔탈리즘』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론적 헤게모니가 이동한 20세기 후반의 전환기적 비평조류를 예견한 선구적 텍스트다. 그래서인지 『오리엔탈리즘』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가 병존하며 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탈식민주의의 서구화·제도화와 그것이 수반한 이념적·이론적 혼종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오리엔탈리즘』이라면, 사이드의 삶 자체도 마찬가지다. 실로 사이드란 인물은 탈식민주의의 속성을 설명하는 추방, 이산, 혼종, 중간지대 같은 단어에 딱 들어맞는 문화적 잡종이며, 정체성의 부재가 곧 그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큼 그의 생애는 여행의 연속이었다. 제3세계 엘리트의 성공신화 같은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 서구와 제3세계, 이론과 실천 등의 온갖 이분법적 경계선이 무색해진다. 특히 컬럼비아대학의 석좌교수로 자리 잡은 이후 사이드가 수행한 역할은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만큼이나 독특하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이라는 차별과 배척의 꼬리표를 달고서도 미국 주류사회의 특권적 위치를 점유했고, 그러면서도 서구 인텔리겐치아의 윤리적 사각지대이자 미국 정부의 외교적 아킬레스건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끊임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사이드는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다. 그런데 사이드의 복합적인 정체성은 탈식민주의의 혼종성과 묘한 닮은꼴을 이룬다. '주변부'의 저항문화가 '중심부'로 진입하여 지배문화를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현상을 두고 사이드가 '안으로의 여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 바, 사실은 사이드의 삶 자체가 탈식민주의적 여행의 축소판이다. 일각에서는 사이드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서양의 백인주류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동양을 이용할 뿐더러 서양과 동양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며 갑절의 혜택을 누리는 '문화적 양서류'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드는 자신의 모호하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오히려 생산적인 요소로 인식한다. 사이드가 볼 때, 비평의 핵심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저항이고 그 저항의 에너지는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자기갱신을 거부하고 안정된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비평은 이미 비평이 아니라 도그마에 불과하다. 사이드가 자신의 비평적 실천에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라는 라벨을 부착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비평가가 가장 빠지기 쉬운 영토주의의 유혹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모든 이분법적 경계선을 넘나들고 무너뜨리는 것이 비평의 본령이기에 사이드는 비평가에게 '권력가'의 권위 대신 '여행자'의 자유를 누리라고 요구한다. 사이드는 제3세계 출신 지식인들이 공유하는 추방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그러한 비평의 토양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추방은 고정된 존재론적 위치의 박탈이며 이는 곧 유연한 인식론적 위치변경의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에게 추방은 상실이자 선물이다. 팔레스타인과 미국 사이에 위치한 사이드는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하거나 귀속되지 않고 양쪽을 동시에 바라보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사이드가 점유한 위치는 '안'도 '바깥'도 아닌 간극이요 '우리'와 '그들' 사이의 접경지대다. 서구의 문화적 세례를 그토록 철저히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동양인'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한 사이드의 모순된 위치는 그로 하여금 비판의식을 체득하고 견지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사이드의 그러한 탈식민적 혼종성과 양가성의 정치학을 구체화하는 첫 번째 기획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와 제3세계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회색인간'이 양쪽을 향해 동시에 발화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에서 사이드의 입장은 일차적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의 독단적인 주장에 대응하는 동양 학자이지만, 그의 또 다른 의도는 제3세계 독자들에게 서구의 문화적 지배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인식시키는 데 있다.『오리엔탈리즘』은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화된 지식인이 서구 안으로 들어가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본주의와 그 문화적 성취를 해부한 보고서다. 이 작업은 '우리'와 '그들'간의 경계선을 고수하며 서구 바깥에서 서구를 비판했던 제3세계 민족주의로서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사이드 이전의 제3세계 작가와 사상가들이 간헐적으로 서구 인본주의에 비판을 가하긴 했어도『오리엔탈리즘』처럼 서구 문화사 전반을 아우르는 통시적 대항서사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서구 이론을 차용하여 서구 문화를 비판하는 체계적 전략과 분석틀을 마련하지 못했다.『오리엔탈리즘』이 탈식민주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선구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오리엔탈리즘』은 탈식민주의 안팎으로부터 끊임없는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대개의 경우 탈식민주의의 혼종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 맥락이나 정치적 입장이 상이한 이론들을 식민담론 비판이라는 목적을 위해 동시에 차용하다 보니 텍스트 내부의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이드가『오리엔탈리즘』에서 끌어들이는 방법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것은 아우어바흐의『미메시스』가 상징하는 서구 리얼리즘, 미셸 푸코의 지식·권력 이론,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다. 좀 더 환원적으로 얘기하면, 세 방법론은 각각 인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한다. 문제는 이들이 다른 어느 것과도 양립하기 힘든 가치체계와 역사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서구 인본주의가 내세우는 보편성과 객관성의 논리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공격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체 철학과 목적론적 역사관을 인정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역사성의 빈곤을 비판하는 식이다. 그런데 사이드는 이러한 세 가지 방법론을 한꺼번에 차용할 뿐만 아니라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조하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이드의 방법론적 전략이 텍스트 내부의 논리적 모순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현의 정치학에 대한 사이드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빈번한 논란거리가 된다. 거기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푸코의 가설은『오리엔탈리즘』의 기본전제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실제 동양'을 서양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 첨삭하고 가공하는 일종의 재현이며, 따라서 '실제 동양'과 '재현된 동양' 사이에는 명백한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 사이드의 논지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인식론이 혼재한다. 하나는 모든 재현은 어차피 현실의 왜곡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탈구조주의적 언어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올바른 재현과 잘못된 재현의 구분이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이다. 한편으로는 사물과 언어의 비동일성을 전제하며 모든 재현은 '언제나 이미' 잘못된 재현이라는 입장에 근거하여 오리엔탈리즘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이드는 동양에 대한 잘못된 재현을 바로잡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며 올바른 재현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사이드의 이론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이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를 오가며 그 양대 전통을 자신의 비평적 실천을 위해 전유할 뿐이다. 따라서 사이드를 니체주의자 혹은 푸코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 것 못지않게 어색하고 부당한 평가다. 오히려 사이드는 니체와 마르크스의 경계선을 의도적으로 넘나들면서 자신의 비평영역을 구축해간다. 사이드가 씨름하는 '방법론적 모순'은 앞서 얘기한 탈식민적 혼종성의 징후인 동시에 비판적 전유를 실천하는 탈식민주의의 전략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오리엔탈리즘』의 '방법론적 모순'을 비판하는 행위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한 비판은 일단 푸코를 끌어들인 이상 시종일관 푸코를 충실히 따르라고 사이드에게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요구는 자기완결성을 원하는 서구 이론(혹은 서구 이론을 추종하는 비평가)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탈식민주의가 제3세계 민족주의와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이 경합하는 장임을 감안한다면, 사이드가 어느 한쪽에 매달리지 않고 생산적인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한 당연하다. 이것이 사이드를 오늘날 탈식민주의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다.
 
 
이경원 교수(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필자 소개>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영문과 박사 취득
현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역서는 바트 무어-길버트의『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저서는『검은 역사, 하얀 이론: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과『파농: 니그로, 탈식민화와 인간해방의 중심에 서다』가 있다. 현재 셰익스피어에 대한 책을 탈식민적 관점에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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