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 민주화의 가능성 보여줘, 반미운동의 기폭제
6.10 - 남녀노소 불문 ‘국민운동’ 승화, 6.29 선언 이끌어

4.19 혁명
 부패한 자유당 정권과 집권욕에 사로잡힌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자행, 전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항쟁이 가장 격렬했던 마산에서는 학생·시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전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이어 4월 18일에 있었던 정치깡패에 의한 고대생 피습사건, 그리고 4월 19일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궐기와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시민 항쟁화를 거쳐 4월 26일에는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결과로 일단락이 되어졌다.

 4.19 혁명은 우리 역사상 발생했던 수많은 민중항쟁 가운데 최초로 민중혁명으로 인해 정권이 교체되는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학생들을 비롯한 전 국민적인 저항에 대해 총칼을 동원한 물리적인 공권력에 의지한 부패정권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세계 역사에서도 몇 안되는 손꼽히는 시민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후 우리 역사에서 모든 사회운동의 구심점이자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19 혁명은 몇가지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첫 째는 혁명의 주도계층이 민중이 아닌 소수의 지식층과 학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계층적인 한계는 혁명의 주도 계층이었던 학생들이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지 못한 채 사회 질서 유지에 나서는 소극적인 활동을 머물게 됐다.

 둘 째는 정치적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제대로 된 진보세력이 발붙일 수 없었다. 특히 1956년 진보당 사건과 1958년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남한내 진보운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4.19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바뀌게 되자 유일한 정치적 대안은 민주당뿐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 매판자본을 토대로 성장한 친일 지주계급이 중심에 있었으며, 이념적으로나 태생적으로나 자유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민주당은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회혼란을 가져오고 말았고, 이같은 사회혼란은 이듬해 박정희에 의한 5.16 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학생이 주도한 민중봉기로 혁명을 이뤄냈지만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에 다시 정권을 넘겨주는 ‘미완의 혁명’으로 그치게 된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후 20년동안 철권통치를 휘두르며 영구집권 음모를 획책하게 된다.

 그러나 권력의 내부에서 발생한 균열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암흑과도 같은 유신 통치하에서 신음하던 국민들은 민주화의 봄을 맞게 된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이 시기는 4.19 이후 처음으로 민중이 주체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4.19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은 이러한 자유화·민주화의 국민적인 욕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또다시 군부에 의한 쿠데타를 허용하게 된다.

 12.12 사태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전두환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은 국민들의 자유화·민주화의 요구를 묵살하고 1980년 5월 17일을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정권장악 음모를 노골화시킨다.

 5월 18일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를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비롯된 광주항쟁은 시민들에 대한 군의 발포,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무장으로까지 이어지면서 27일까지 처절한 투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신군부와 계엄군의 언론통제와 전화통제, 그리고 직접적인 포위로 인한 외부와의 단절로 고립되면서 전국적인 확산을 이뤄내지 못하고,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물리적인 권력에 맞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 국민적인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특히 광주항쟁 과정에서의 외부와의 단절은 이후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려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의도적인 분열정책과 결합해 동서간의 지역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반면 5일간의 해방광주를 거쳐 5월 27일 도청함락 때까지 10일 동안 이어졌던 광주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민주화 항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째는 군의 발포에 저항해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했고, 이들은 5일 동안 광주를 해방지구로 만들었다. 국가 공권력과 유리된 상황에서, 더구나 계엄군의 포위로 생필품도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 치안과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은 당시 민중들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민주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둘 째는 5.18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게 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미국의 이미지는 엄청난 원조와 함께 안보를 제공하는 ‘우방’이며,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항쟁당시 광주시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입항한 것에 대해 미국이 전두환에게 압력을 가하여 광주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미국은 전두환에게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사실상 미국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공수부대가 출동하고, 시민들에 대해 발포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광주학살의 배후조종자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실제 미국은 광주학살 이후 전두환을 한국의 대통령으로 인정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의 총체로 지목받게 됐다.
이는 또 부산 미 문화원 방화와 서울 미 문화원 점거투쟁 등 이후의 반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87년 6월 항쟁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공포정치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거듭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점 정권의 위기감을 늘려갔고 이러한 위기감은 정권으로 하여금 더 큰 폭력에 의지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초에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전 국민적인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고 이러한 분노는 민주화의 염원으로 승화되어 갔다.

 1987년 4월 13일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에 대해 전두환은 호헌조치로 맞섰고, 이것은 전 국민적인 저항으로 이어져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6월 10일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력이양이 진행되는 날을 맞아 전국에서는 약 30만명의 국민들이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국민적인 저항은 더욱 강해졌고 결국 노태우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게 된다.

 6월 항쟁은 우리 민중운동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째는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로 민중 항쟁이 전국적으로 그리고 전 계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항쟁이 중심이 되는 도시와 그 주변만의 항쟁이 되었다면 6월 항쟁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또 초기에는 정치인과 대학생이 중심이 됐으나 이후 화이트칼라로 대표되는 직장인 등 대한민국 국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참여하는 국민운동으로 승화됐다. 그리고 이러한 전국적 전 계층적인 저항으로 결국은 군대투입까지 거론하며 협박한 군사정권의 항복을 받아내게 됐다.

 둘 째, 6월 항쟁은 억눌렸던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자신들의 권리찾기에 나서는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이래 수출위주의 경제 성장이라는 노동착취적인 경제정책 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았던 노동자 계층은 6월 항쟁 이후 7, 8, 9월 3개월에 걸쳐 전면적인 대투쟁에 나서게 된다.

 4.19 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과는 달리 6월 항쟁은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혁명이 좀 더 근본적인 경제적, 그리고 민중적인 혁명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 대투쟁은 6월 항쟁을 물리적으로 단절된 하나의 혁명이 아닌 우리사회의 기본적인 모습을 변화시키는 혁명으로 완성시켜 나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의 대격변기 때마다 학생운동은 가장 선봉에 서서 역동성과 조직성, 선진성을 앞세워 사회변혁을 이뤄내는 동력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4.19 혁명을 통해 형성된 학생운동의 전통은 이후의 6.3한일협정 반대투쟁, 삼선개헌 반대투쟁과 유신반대 투쟁으로 면면이 이어지며 학생운동의 전투성과 헌신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광주항쟁을 계기로 70년대까지의 낭만성과 감상주의 성향이 극복되고 과학적 세계관과 변혁성이 확보되면서 80년대 학생운동은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이념을 정립하고 명실상부한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중심으로써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소 문 관 (전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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