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수강생이 1학년인 틈바구니 속에서 듣는 첫 수업시간이다. 새 학기의 분위기에 아직 적응이 덜 된 상태여서 덜컥 오전수업을 듣자니 쏟아지는 잠과 서먹한 사람들 속에서 멀뚱멀뚱 시선이 아득하다.

 교재를 비롯하여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바라본다. 명색이 미술사를 전공하는 입장임이 분명한데 선사시대 알타미라나 라스코 동굴 벽화를 좀 보다가는 주위가 산만해진다. 뭐 어디서 보고 아는 그림이라 이거지, 흥미가 안드로메다에 가고 슬라이드 화면이 순간순간 반짝였다가 꺼져간다.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 그림·조각·건축·공예·서예 따위로, 공간 예술·조형 예술 등으로 불린다.’, 미술의 사전적 정의이다. 얼마 전 수업 도중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가 생각났다. 익히 들어보고 시험 본답시고 고생 꽤나 했었는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앞자리의 사람이 낙화유수 일변을 토한다. 분명 우리가 인지하고 더불어 요구하는 모범안이다. 그러나 그렇게 진부한 규정과 정언만으로 석연치 못한 감이 있다. 미술 역시 언어의 정의로 못박아지는 이데올로기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예술의 분야에서 창작과 표현은 작가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작품을 대하는 관람자 등과의 관계 속에서 상보적이면서도 대립적인 모습을 취했다.

 세계는 대상과 사물의 명제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못하는 모순을 안고서 끊임없는 변모의 관계를 형성해 왔다. 의문과 호기심에 구체적이고 정확한 개념을 빌어 세계는 이론과 체계 말고도 다양한 문제들로 논의 되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다른 논의와 해석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매체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 역시 미술과 미술가의 입장에서 등장하였다.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작품들은 미술의 시대적 변화와 함께 참여적인 형태로 나아갔다. 미술 작품은 감상과 배후에 내재하는 미술가들의 생애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열정과 창작의 산물로 선보여졌다.

 그러한 입장에서 미술의 범주에 포괄되는 영역 또한 과거와 현재로 구분 되지 만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각기 다른 대상과 주체를 통해서 미술은 세상을 경유할 것이다. 그렇지 못해 자기 자리를 잊는다면 분명 미술로서의 역할과 담당을 상실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소수의 권위와 소유의 형태에서 예술적 삶을 꿈꾸는 것인가, 삶의 예술을 바라는 것인가. 뚜렷하게 손에 잡히지 않을 듯한 질문들이다. 우리가 곧이곧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모든 것들이 죄다 진실은 아니다.

 반복에 의해 학습 되고 시간에 굳어져 습관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도 미술이다. 미술사를 포함한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의문시되는 실재를 재현하는 것인가, 관념의 추상을 표현 하는 것인가 등의 문제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기인한다.

 문화 형성과정의 결정과 예술의 주체는 고정불변의 성질이 아닌 우리의 현실과 연관된 창조의 영역이다. 살랑거리는 봄 햇살이 돌아왔다. 얼마 전 타계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을 추모하며,

 가까운 학교 박물관으로 사뿐거리는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은 어떨지 싶다. 현실의 삶이 예술의 위치에 자리매김 하는 일은 머나먼 얘기만이 아니다. 우리의 망막 너머 우리 가슴에는 무엇이 담겨지고 있는 것일까.
천 명 구 (인문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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