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도 넘게 '정주행'을 한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독일편>이다. 프란츠 카프카에서 시작된 나의 독일 사랑은, 외국인들이 "한국 사랑해요"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됐다. 고등학교 때는 독일인 친구와 1년 가까이 펜팔을 했다. 그때 친구가 추천해준 곡이 네나의 '99 Luftballons'이다. 1983년에 발표된 이 곡은 독일을 비롯해 영국,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며 차트 1위에 올랐다. 가사 내용은 대충 이렇다. 장난감 가게에서 산 99개의 빨간 풍선을 하늘로 올리자, 이를 초비상 사태로 착각한 군대가 전투태세를 갖춘다는 얘기다. 당시 동서로 나뉘어 전쟁에 예민했던 독일인들은 1990년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통일을 이루게 된다. 이 곡이 독일인들에게 얼마나 기념비적인지는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기쁜 일이다. 반면 슬퍼지기도 한다. 한국인으로서 그렇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자랐다. 이 성장은 '무사히' 이뤄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평화는 불안을 전제로 둔 가짜이기 때문이다. 공동경비 구역의 군인들은 '가장 빠르게 총을 쏠 수 있는 자세'로 경계 중이고, 긴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가짜 평화 속에서 스러졌다.
 얼마 전에는 북한 어린이의 탈북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이제 겨우 9살이 된 어린이는 혼자 기차를 타고, 기차 안에서 능숙하게 빨래를 하고, 약속된 장소를 찾아 브로커를 만나고, 옷을 흐트러짐 없이 차곡차곡 갰다. 나는 경악했다. 9살이 저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저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나? 나이가 잘못 나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말하는 투도 도저히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정신적으로 조숙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이것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민족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평화는 승전국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같은 것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평화를 중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그가 말하는 두 국가 간의 평화란 어디서 비롯되는가. 이스라엘의 승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그의 사위인 재레드 쿠슈너가 정통 유대인일뿐더러, 이스라엘의 한 장관은 트럼프의 당선을 팔레스타인 국가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경제를 이끄는 '미국산' 대기업의 과반수가 유대인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심지어 전쟁의 고통은 특정 사람들 사이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시리아에서 탈출한 난민 중 일부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정착해 이도 저도 못 간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난 뒤 더 확신하게 됐다. 분쟁 지역에서 탈출해서 간 곳이 분쟁 지역이라니. 전쟁의 고통은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으나 정해진 부분 안에서만 해당된다. 잔인하다.
 고통의 몫은 나눌 수 없더라도 그게 남의 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불쌍하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가장 실천적인 방안으로는 난민수용이 있다. 1948년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14조에 의하면, 난민들은 박해로부터의 비호를 타국에 요구하여 향유하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최근 IS의 테러로 인해 난민수용소를 폐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수주의가 짙어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난민보다 탈북자의 숫자가 훨씬 많다. 이와 관련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여야 하는데, 정작 2017년 북한이탈주민정착금 예산안은 지난해보다 100억이나 줄었다고 한다. 이게 어떻게 고민되어야만 하는 사안인 걸까. 인권 앞에서 이방인인 존재는 아무도 없다.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