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 솟은 코, 커다랗고 깊숙한 눈,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 뽀얀 백색 피부, 잘록한 허리와 늘씬한 다리… 우리 시대의 미인도다. 이것은 연예인이면 갖춰야 하는 신상명세서이자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미/추의 시금석이다. 이 기준에 맞는 사람이 극소수임에도 거기에 포함되지 못하는 자들은 TV 코미디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끊임없는 풍자와 비하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그 허다한 성형외과들이 이 '보편적' 기준에 맞추어 우리 몸과 얼굴을 뜯어고친다. 눈을 찢고 콧속에 이물질을 집어넣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뼈를 깎는 고통도 감수하며 우리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열성' 유전자를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매일 아침 화장할 때도 더 밝은 색조로 덧칠하여 '백색 미인'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이제 '누런 피부' 위에 '하얀 가면'을 쓰는 건 더 이상 비유에 그치지 않고 일상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그새 우리의 마음과 정신도 매일 성형수술을 받는다. 항상 마취 상태여서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어디 그뿐인가? 길거리에 나가보라. 문화수준이 높다는 곳일수록 업소 간판과 광고 카피는 외국어로 도배되어 있다. 서울 도심지를 걷다 보면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쇼핑몰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한국인에게는 세계화가 곧 서구화임을 매일의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설령 외국 상표와 언어의 범람이 돈과 힘의 문제임을 감안하더라도 서구를 향해 기울어진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맹목적이다. 특히 영어는 서구 편향성이 가장 구조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이다. 남의 언어임에도 영어는 계급을 결정짓는다. 가히 영어제국주의 사회라 할 만하다. 영어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도 가지고, 좋은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일찍부터 영어를 접하는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영어가 신분 상승의 사닥다리요 신분 세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대다수 한국인들은 원어민처럼 영어를 할 수 없다는 '원주민 콤플렉스'에 일평생 시달려야 한다.
 서구 의존도가 상당히 해소되었다는 문화 콘텐츠 시장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오페라·뮤지컬·연극·영화·컴퓨터 게임 등의 분야에서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소재는 여전히 별미나 양념일 뿐이다. 극장가를 점령한 할리우드 영화도 미국이 세계화의 모델임을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시킨다. 액션·어드벤처·로맨스·애니메이션, 어느 장르에서든 흔히 접하는 주제는 피부색의 차이에 따른 대립 구도다. 한쪽에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을 쳐부수고 임무를 완수하는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화이트 슈퍼 히어로'가 있고, 다른 쪽에는 우둔하고 잔혹하며 호색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백인 영웅을 돋보이게 하는 흑인·아랍인·히스패닉·차이니즈·인디언 같은 '유색인 악당'이 있다. 그리고 그 백인 영웅이 야만과 미개의 땅을 유린하는 서사시적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이국적 매력이 넘치는 '오리엔탈 미녀'가 승리의 보너스로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쪽과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누구와 함께 열광하고 누구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소비하는 것은―아니면 그러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은―서구의 이미지다. 매일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누런 피부'를 가린 '하얀 가면'들을 마주친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일등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서구의 문화적 코드를 내면화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 더 서구를 닮으려고, 좀 더 서구적인 삶의 방식과 스타일을 좇아가려고 열심히 토플 학원도 다니고 유학도 떠난다. 정말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다. 왜 이래야만 하는 걸까? 원래 내 모습이 그렇게 못난 걸까? 내가 그토록 덮어쓰고 싶어 하는 '하얀 가면'은 도대체 무엇인가? 가끔 회의도 들지만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는 그런 자기비판의 제스처가 냉소적 사치라는 생각에 금방 수그러진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몸과 마음에 각인된 이미지가 식민주의 역사의 유산이라고 얘기한다면,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비관론자의 시대착오적 넋두리로 들릴까? 이토록 엄청난 힘으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백색 신화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전략이라고 의심한다면 너무 거창한 논리적 비약이요 이데올로기적 과잉 반응일까?
 그렇지 않다. 왜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인물이 바로 프란츠 파농이다. 흔히 우리는 인간 소외나 억압을 얘기할 때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습성을 지닌다. 즉 나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문제로 접근한다. 특히 식자층에게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그런데 내 '안'과 '바깥'의 경계선을 긋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는 둔감해진다. 억압을 억압으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을 파고든 서구 중심주의는 이제 거의 무의식적인 욕망이요 삶의 규범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파농은 이처럼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쓴 모습이 소외요 억압이라고 보았다. 백색 신화의 최면에 걸린 그의 동시대 흑인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파농의 준엄한 질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제3세계 독자들을 비켜 가지 않는다. 때문에 파농의 저서를 마주하면 격세지감보다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다. 파농이 태어나고 자라난 마르티니크 섬의 서글픈 현실이 한국 사회와 중첩될 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또한 불편해진다. 파농의 현재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세기 전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파농과 지금 탈식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파농과 우리 시대의 연속성은 그의 저서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농이 그의 첫 번째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가장 천착하는 문제는 식민지 원주민의 자기소외다. 파농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의 흑인에게 프랑스 언어와 문화가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는 양상을 상술한다. 여기서 파농이 주목하는 것은 흑인의 이중적 소외, 즉 백인에게서 소외되는 동시에 자신에게서도 소외되는 양상이다. 백인은 선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흑인은 악하고 더럽고 추하다는 인종주의적 이분법을 흑인 스스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특히 엘리트 '혼혈'흑인은 백인의 언어를 구사하고 백인의 문화를 흡입하며 때로는 자신을 백인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흑인이면서 흑인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현상, 하지만 정작 백인에게는 동료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 이것이 파농이 말하는 흑인의 이중적 소외다. 이 모습은 정신적으로 식민화된 흑인 엘리트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 동시에 젊은 시절 파농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마르티니크와 대한민국의 연속성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프랑스와 불어 대신 미국과 영어를 집어넣고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다시 읽어 보자. 그래도 모자라면 파리와 마르세유를 뉴욕과 로스엔젤리스로, 마르티니크 부두를 인천국제공항으로, 몽테스키외·루소·볼테르를 푸코·데리다·들뢰즈로 바꾸어 보자. 그들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
 이중적으로 식민화된 흑인을 향한 파농의 시선은 후기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더 차갑고 날카로워진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파농의 과거 모습을 반추했다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파농의 동시대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전자가 카리브 연안의 흑인 원주민을 지목했다면 후자는 아프리카의 토착 부르주아지를 겨냥한다. 파농이 보기에, 탈식민화와 민족해방의 가장 큰 걸림돌은 토착 부르주아지다. 그들은 식민 권력에 기생하며 배당금을 챙기는 식민주의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뒤집어쓰고 백인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그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식민화된 계층이다. 문제는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파농이 분노와 함께 수치심마저 느낀다는 아프리카의 토착 부르주아지와 한국 사회의 지배엘리트가 닮은 점이 너무 많다. 해방 이후 민족의 이름을 내걸고 미국의 신식민주의 헤게모니에 영합하며 개발독재와 천민자본주의의 주역을 담당했던 한국의 지배계층이 아프리카 신생독립국의 토착 부르주아지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파농이 개탄해 마지않는 근대화의 그늘은 우리의 과거일 뿐이라고 얼버무릴 만큼 우리의 현재는 충분히 달라졌는가?
 파농의 고뇌와 절규가 21세기 한국 독자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시 돋친 그의 직설화법을 대하기가 부담스럽거나 무의미해질 것이다. 파농을 읽는 것이 언어의 유희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더 정직하게 돌아봐야 한다. 파농의 동시대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쩌면 백색 신화의 최면에 빠진 채 '하얀 가면'을 덮어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탈식민(post-colonial)' 시대가 진정 '탈식민화된(decolonized)' 시대는 아니라는 역사인식을 공유할 때, 파농과의 만남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한때 '그냥 멋으로' 체 게바라의 초상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듯이 파농을 그렇게 가볍게 읽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파농의 현재성에 대한 질문을 건너뛰거나 에둘러 가지 않아야 한다.
 파농은 칸트나 헤겔처럼 범접하기 힘든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고, 푸코나 데리다 같은 정교하고 난삽한 이론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레닌이나 모택동처럼 세계 지도를 바꿀 만큼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정치혁명가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파농을 다시 읽는 이유는 우리가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항상 자기성찰과 자기희생의 실천을 수반했다. 때문에 파농과 마주 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안락의자' 지식인들은 부채의식을 넘어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니그로'에서 인간으로 거듭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향해 함께 인간답게 살아가자고 외쳤던 흑인 청년을 우리가 기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윤리적 진정성이 그의 정치적 편향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인간의 억압과 소외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사람, 인간 존재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현실 역사 속에서 구현하려고 애썼던 사람,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바로 파농이다. 그런 점에서, 파농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자신이 꿈꿨던 '새로운 휴머니즘'의 살아 있는 모델이다.
  이경원 교수(연세대학교 영어영문과)
 
<필자 소개>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영문과 박사
주요 역서 : 바트 무어-길버트 『탈식민주의 : 저항에서 유희로』

주요 저서 : 『검은 역사, 하얀 이론 :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 『파농 : 니그로, 탈식민화와 인간해방의 중심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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