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市)의 옛 이름은 이리다. 이리는 안개의 고장이다. 봄, 가을의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낀다. 오래전, 이곳은 늪지였다고 했다. 시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금강과 만경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는 길의 경계를 지웠다. 안개의 막을 뚫고 기적소리가 났다. 호남선과 전라선을 타고 기차는 수시로 지나갔다. 백 년 전부터 계속된 풍경. 이리 사람들에게는 '이리로 가면 이리'라는 우스갯말이 전해진다. 한때 세상의 길은 이리로 통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이리로 연결되고, 천년도 더 된 국도    1호선이 지나간다. 해상 왕국 백제가 이리로 온 것도 수로 교통의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리는 익산의 옛 이름이다.

 
 K는 이리역 플랫폼에 섰다. 역 광장에는 기차에서 막 쏟아져 나온 통학생들로 북적하다. 통학생은 안개와 더불어 이리시의 명물이다. 수출자유공단이 쇠락하면서 기차승객은 근로자보다 학생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K는 이리시에 소재한 W대에 80년대 후반에 입학했다. W대는 호남의 명문사학이어서 군산, 전주, 김제의 학생들은 물론 강경과 정읍 같은 멀리서도 통학생들이 다녔다.
 호남선과 전라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좁은 개찰구를 통과하기 위해 몰려들면서 K는 역사 밖으로 밀려갔다. 팝콘처럼, 기차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떠났다. 역 광장에는 W대 버스가 도열해 있었다. K는 간신히 통학버스에 탔다. 민주화의 열망과 자본주의의 안락함이 혼재한 90년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리도 이름을 익산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리'라는 이름에는 일제의 식민지 개발의 냄새가 배어 있다.
 쌀을 가득 실은 군산행 증기기관차는 이리가 호남교통의 중심지로 선택된 이유다.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 호남선이 준공되었고, 1914년 전라선이 개통됐다. 기찻길을 따라 판잣집들이 생겼고, 농토를 잃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갈대밭에 불과하던 솝리(옛 익산 지명)에 철도가 개통된 지   10년 만에 일본인은 15배(3천 500여 명)로 늘었다.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교차하고 호남의 서남부를 연결하는 도로를 닦자 이리는 식민지 교통의 중심이 되었다.

▲ 익산역 옛 모습, 호남평야에서 수탈된 쌀은 이곳을 통해 군산항으로 수송됐다
새벽을 가르는 기적 소리는 피식민지인에게 '거리'와 '차이'를 부각시킨다. 소설가 양귀자는 『숨은꽃』에서 이리역을 그린다. "이리에 다 왔을 때까지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면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눈꺼풀을 사이에 두고 나는 여전히 세상 속에 있었다. 기차가 이리에 멈추었을 때 나는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 길을 통해 나는 세상에 나왔었다. 한때의 기억들은 모두 이 길의 언저리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양귀자는 이 작품으로 1992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이리역 대합실에서 저마다의 막연한 동경 혹은, 각오를 다지며 기적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K의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는 군부 독재의 연속이었다. 거리는 물청소를 해도 최루탄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다행히 경제는 활황이었다. 수도권의 대중문화가 기찻길을 타고 이리로 빨려 들어왔다가 간판을 바꿔 나가곤 했다. 대학로에 통닭집이 하나둘 늘었고 역 광장에는 새벽까지 낭만과 치기가 흥건했다. 그러나 노동집약형 산업이 쇠퇴하면서 섬유공단에 있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K는 다짐했다. '이리로는 다시 안 와!' 서울행 열차에는 수많은 K가 막연한 기대와 불안을 품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어쩌면 이 불안의 시작은 1977년 11월 11일 밤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박태건 교수(교양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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