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까지는 심드렁했다. '뭐야. 지금 나한테 서울 투어 시켜주는 거야?' 싶었다. 지루함을 참고 보게 만드는 힘이라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울려 퍼지던 재즈였다. 그 재즈의 선율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끝이었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보길 잘 했다!'

 원작은 일본 작가인 타이라 아즈코의 단편 소설 「멋진 하루」이다. 소설은 어떤 느낌일까 싶어 찾아 읽어보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자니, 내게는 영화가 원작처럼 느껴졌다. 보는 동안엔 무료하게 지나쳤던 서울의 풍경이 막상 원작과 만나는 순간에는 뚜렷하게 떠올라 독서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당시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경험이나 이미지가 훗날 추억으로 회상된 적이 많았다. 멋진 하루와 같은 소설집에 실려 있는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이라는 작품에서도 이런 구절이 적혀있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어제 일처럼 기억나는 것은 여름날 학교 운동장의 수돗물이라든지, 개와 함께 본 강가의 석양이라든지, 목욕탕에 다녀오다 아버지가 포장마차에서 사준 어묵' 같은 거라고.
 그래서일까? 희수가 전 남자친구인 병운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는 어떤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병운이 만나는 사람들-매우 일상적인 하루를 지나고 있는 그들이 아무 의미 없이 병운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이 몰랐던 그를 알게 되는 것이다.
 줄거리 설명이 조금 늦었다. 직장도 없고 통장에 돈도 없는 희수(전도연)는 어느 날    1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빌려줬던 350만 원을 돌려받기로 결심하고 경마장으로 나선다. 일행과 앉아있던 병운(하정우)은 희수를 발견하고 반갑다 인사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대답이 아니라 "돈 갚아"라는 요구이다. 그러나 병운에게는 돌려줄 350만 원이 없다. 희수와 헤어지고 난 뒤 결혼을 했다가 두 달 만에 이혼했고,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하고 빚까지 져버린 처지다. 병운은 그 350만 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꿔서 갚기로 한다. 그렇게 희수는 병운과 함께 하루 동안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게 된다.
 한 사람에게 70만 원, 또 한 사람에게 50만 원…… 꿔준 돈을 다시 받으려는 것뿐인데, 희수의 처지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소 굴욕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상한 희수가 자리를 뜨려고 하면 철없는 병운은 네가 참으라는 식으로 군다. 심지어 희수에게 "넌 너대로의 사정이 있고 난 나대로, 그 앤 그 애대로 사정이 있는 거지"라고 말하면서 이해를 요구하기까지 한다. 정말이지, 철딱서니가 없어도 너무 없다. 가볍고, 구차하고, 지나치게 엉뚱하고, 찌질하고, 한심하다. 내가 이런 놈을 사랑했다니. 희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심지어 그들이 사귈 때 함께 갔던 음식점도 문을 닫았다. 사랑이야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보다는 오래갈 줄 알았던 추억도 끝난 지 꽤 되었던 것이다. 남은 것은 병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뿐. 그러나 350만 원을 채워갈수록, 희수가 병운을 생각하는 태도는 조금 달라진다. '너 왜 그러고 사냐?'가 '너 그래도 잘 살고 있었구나'로 변모한다. 내게 별로인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별로인 것은 아니다.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기 마련이고,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병운 오빠, 꽤 괜찮지 않아요?"라고 되묻는 그의 조카처럼, 병운이 언젠가 자신을 도와준 적이 있다며 선뜻 돈을 주는 초등학교 동창처럼.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인 건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테지만, 희수라고 해서 상처를 받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래, 네 말마따나 내가 뭔 상처를 받아봤겠냐. 근데 나도 조금은 아팠었어. 네가 헤어지자고 한 후에 말야. 마지막으로 본 네 얼굴이 안 잊혀지는 거야. 이상하더라구"라는 병운의 대사처럼 말이다. 항상 웃는 낯인데다가 껄렁거리기만 하는 병운에게도 누군가에게 맞아 곪아 터진 연약한 내면이 있었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My dear enemy'이다. 번역하면 나의 친애하는 적이라는 뜻이 된다. '친애'와 '적'이라니. 전혀 상응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러나 영화 내용처럼,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몰랐던 인물을 지칭하는 데에는 이만한 표현이 없는 듯하다. 어차피 일상이란 건 타인에 대한 이해의 연속이지 않은가? 그 연속 안에 이 영화를 끼워 넣는 어느 날이, 모두에게 '멋진 하루'가 되길 바란다.
  박서영(문예창작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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