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을 보면, 처절하기까지 하다. 일류대에 진입하기 위한 학생들의 사교육비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자신의 진로보다 그야말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재수, 삼수를 한다. 고3 학생을 위한 가족의 희생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학생 중심의 '고3가족'을 만들어낸다. 실업계 특성화 학교에서도 95% 이상은 대학진학을 위해 입시공부를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보다 나은 대학으로 이동하기 위해 편입시험에 목을 맨다. 심지어 학력을 위조해서라도 좋은 학벌을 가지려 한다. 
 어느 사회나 학력에 의한 사회적 보상의 차이는 있다. 미국의 구조기능주의 사회학자 데이비스와 무어(Davis & Moore)는 1945년에 이미 학력에 따른 능력과 업적 수준에 따라 상이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능력주의나 업적주의를 제시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만연해있다. 심지어 촛불로 등장한 현 정부에서도 학벌은 능력 평가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잣대다. 문제는 학벌이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불평등한 구조를 만들고, 이로 인해  보상의 공평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데에 있다.
 학벌(學閥)은 학력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파벌이다. 같은 학연을 가진 사람들끼리 소위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부와 권력, 명예를 독점하는 권력집단이 바로 학벌이다. 학벌은 학교를 매개로 형성되기 때문에 혈연집단과 같은 귀속적 지위를 처음부터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번 학교가 정해지고 특정 학교를 중심으로 학벌이 형성되면, 그때부터 학벌은 영원불멸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준다. 이 과정에서 유일하게 개인능력이 발휘되는 것은  학교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한번 만들어진 학벌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누구나 몸부림친다. 
 한국에서 학벌의 힘은 막강하다. 교수나 변호사, 의사들도 어느 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진다. 한번 학벌이 만들어지면, 그들의 차별적 특권을 보호하고자  끊임없이 '구별 짓기'를 시도한다. 그래서 학벌은 권력과 신분의 상징이자 배제와 사회적 폐쇄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학벌은 사회계급에 따라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실제로 서울대 진학률은 강남에서 가장 높다. 이들은 부모의 대를 이어 학벌사회의 중심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향유한다. 개인능력과 업적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지는 사회이동은  정치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학벌은 해체되어야 한다. 만약 구조적으로 해체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학벌이 권력과 신분의 수단으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라도 마련해야 한다. 600년 조선의 붕괴가 붕당정치의 폐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능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그리하여 자유로운 사회이동이 가능한 사회가 바로 촛불혁명이 꿈꾸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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