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베트남전이 끝날 무렵 한국인들에게는 월남전이 훨씬 익숙했다. 지금은 월남이라는 용어가 마치 사어(死語)처럼 되어 버렸지만 가끔 '월남쌈'이라는 말이 들리곤 한다. 한국인들에게 베트남은 전쟁의 기억만 떠올릴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베트남전 참전 한국 군인들이 생존해 있으며, 그들의 기억과 후대의 기억들이 모여 베트남에 대한 인상이 형성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40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는 베트남이 동남아에서 떠오르는 시장이자 노동력 공급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간간히 북한의 개혁개방의 모델이 베트남이 될 것이라는 빠른 진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문화'라는 새로운 단어가 자리잡게 된 중요한 원인도 베트남과의 국제결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한국과는 여러모로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사실이다.
   베트남의 수도는 호치민이다. 예전 사이공을 베트남 전쟁 이후에 변경하였다. 호치민,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그를 국부로 추앙한다. 호치민기념관에서 어느 할머니는 어린 손자와 함께 와서 최고의 존경을 공송한 태도로 보내는 장면이 많이 목격된다. 호치민은 베트남이 자주독립하는 데 가장 공헌이 큰 인물이다. 그가 한국의 독립운동과 작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8년 10월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저우에서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새로운 정착지로 향했다. 광서성 류저우(柳州)이다. 이곳에서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했으며, 특히 낙군사(樂群社)에서는 임시정부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다. 낙군사는 근대식 건물로 1910년대 건축된 것으로 류저우에서도 상징적인 연회장소이자 호텔이었다. 호치민은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1920년대에 광저우와 류저우를 오가면서 바로 이곳에서도 머물렀다고 한다. 사실 광서성은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왕래하기에는 불편함이 적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호치민은 1930년대 모스크바에 가서 혁명활동을 전개할 때 조선의 혁명가 김단야와도 만나게 된다. 김단야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 조선학부장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이들은 모두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혁명가로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김단야는 1938년 일본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소련에서 처형당했고, 그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른다. 호치민은 소련에서 귀국한 후 자신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베트남 젊은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베트남은 인구 1억명의 대국이자 한국과는 인적 관계 면에서 가장 강렬하게 연결돼 있는 국가로 자신들의 역량으로 제국주의지배, 분단을 이겨내고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전진하고 있다. 내년이면 한국도 독립선언 100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한다. 새로운 100년을 위해서 베트남의 국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 걸어온 길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내공의 세월을 함께 기억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사치는 아닐 것이다.

김주용 교수(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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