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대학은 구현하고자 하는 건학이념이 있다. 원광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원불교의 개창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 이하 소태산)의 생애와 사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에서는 소태산사상 가운데 특징적인 사상의 하나인 개벽사상에 대하여 검토함으로써 원광대학교 건학이념의 사상적 연원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한국근대 민중종교와 개벽사상

 한국근대 민중종교 개창자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개벽(開闢)사상은 소태산에 와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상은 아니다. 개벽이란 말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G주역(周易) H에 이미 등장하며, 송나라 소강절에 이르러 선후천(先後天) 개념과 연결되어 더욱 구체화된다.

소강절은 그의  『황극경세서(黃極經世書) 』속에서 우주의 역사는 춘하추동의 생장렴장(生長斂藏)의 이치를 따라 원회운세(元會運世)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주 1년 즉 1원(元)은 12만9천6백 년이요, 그 1원에는 다시 12회(會)가 있으니 1회인 1만8백 년마다 소개벽(小開闢)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1회에는 30운이 있으며 그 1운은 360년이고, 또 1운에는 12세(世)가 있으니 1세는 30년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1원은 12회, 360운, 4,320세, 129,600년이 된다.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첫 회(會)인 자회(子會)에서부터 시작되어 6회 째인 사회(巳會)까지 성장하며 후반부 첫 회인 년회(午會)부터 해회(亥會)까지는 줄어드는데, 우주의 가을에 해당하는 미회(未會)에서는 우주의 시간대가 새로운 질서로 접어드는 후천개벽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소강절은 또한 우주의 1원(元)  12만9천6백 년 가운데 인류 문명의 생존기간은 건운(乾運)의 선천 5만 년과 곤운(坤運)의 후천 5만 년이며, 나머지 2만9천6백 년은 빙하기로 천지의 재충전을 위한 휴식기라고 보았다. 요컨대 소강절에 따르면 우주의 가을이 되면 우주의 봄과 여름인 선천 5만 년이 끝나고, 후천 5만 년의 역사 즉 후천개벽의 새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소강절의 개벽사상과 선후천 개념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그 과정은 자세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에서 개벽사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조선후기(朝鮮後期)이다.

 규장각(奎章閣)이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후기 인물들의 문집(文集) 속에는 17~19세기에 걸쳐 개벽이란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개벽을 말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민중의식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개벽사상의 밑바닥에 민중적(民衆的) 전통이 흐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과 증산교, 원불교 등 근대 한국 민중 종교사상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개벽사상의 뿌리는 조선후기 민중적 지식인들의 개벽사상에 닿아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역』에 나타난 개벽사상, 소강절의 개벽사상 그리고 조선후기 민중적 지식인들의 개벽사상을 수용하여 최초로 체계화한 이는 동학의 개창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이하 수운)였다.

 그는 우선 신분적 처지가 조선후기 일반 민중들과 다름없었으며 그로 인해 과거 응시를 포기한 채 오랜 세월 전국방지를 돌아다니며 민중들의 소망을 읽어낸 뒤 동학을 창도하였다.

 수운은  『동경대전』  (한문)과  『용담유사 』(한글)를 저술하여 그 속에서 ‘다시 개벽’, ‘개벽 후 오만 년’ 등의 표현을 빌려 동학의 개벽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수운에 와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개벽사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일대 전환을 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즉 동세개벽(動世開闢)이 실패하였기 때문이며, 그 실패의 대가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새 사상이나 새 종교가 등장할 때 그 역사적 의의를 그저 그것을 만들어낸 한 개인의 창조적 노력의 결과로만 이해하는 것은 좁은 해석이다. 모든 사상, 모든 종교는 그것이 성립되는 시대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모든 사상, 모든 종교는 당대의 시대상황을 깊이 호흡하는 가운데 성립한다.

 그러므로 시대상황이 달라지면 사상이나 종교들의 대응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일찍이 조선후기 개벽사상을 체계화하여 등장했던 동학이 ‘동서개벽’을 위해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실패하자, 증산교의 증산 강일순(1871~1909, 이하 증산)은 개벽사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른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와 그에 따른 민중의 희생을 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증산에 의한 새로운 개벽사상은 대체로 정세개벽(靖世開闢)으로 정리되는데 그는 동학의 동세개벽(動世開闢)의 길과는 일정하게 선을 그었다.

 수운이 철저하게 제도화를 통한 개벽을 지향했다면, 증산은 철저하게 탈제도화를 통한 개벽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증산의 정세개벽, 즉 탈제도화를 통한 개벽 역시 그의 사후, 새로운 시련에 직면한다. 탈제도화의 부작용이 무수한 분파의 난립으로 이어져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종교로 비판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의 개벽사상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은 1891년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마디로 고난의 시대이자 대전환의 시대였다.

 밖으로는 서세동점이라 일컬어지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안으로는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사회의 풀뿌리 민중들을 더욱 위기로 몰아간 것은 천주교(서학)의 만연이었다.

 조선 오백 년을 지탱해 온 유교적 제사(儒敎的 祭祀)를 부정하고 신분제를 부정하는 천주교의 만연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뿌리 채 뒤흔드는 가공(可恐)할 만한 사태였다. 이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동학이 등장하여 후천개벽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불을 당겼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박 맹 수 (원불교학과 교수)
<다음호에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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