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4주년 기념행사로 '2019 문학인과 함께하는 백제역사 문화 탐방'이 지난 4월 13일부터 14일, 익산 시청의 도움을 받아, 원광대 대안문화연구소의 주최하에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개최됐다. 행사에는 본교 국문과 졸업생인 안도현 시인을 포함한 여러 문학인, 몇몇 대학의 교수들이 초대됐다.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나아가 익산문화유산과 익산을 소개하고자 관련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이건 아니다. 1300여 년 전에 지어진 석탑에 티타늄 임플란트에 에폭시 충진이라니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20년에 걸친 전면 보수작업 끝에 다시 공개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바라보는 이들은 누구나 아쉬움을 느낄 만하다. 긴 세월 동안의 보수 작업을 마쳤으니 7층이든, 9층이든 온전한 탑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하다. 제 자리를 찾아야 할 본래의 돌들은 주변에 뒹굴고 새로 깎아 넣은 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복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하듯이 티타늄으로 심을 박고 돌을 깎아 붙였다. 갈라진 돌 틈에는 에폭시를 채워 넣었다. 누구나 '이건 아니다.'라고 말할 법도 하다.
 비극의 시작은 1915년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시멘트 보수작업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진, 그마저 곧 붕괴될 위기에 처한 석탑의 마지막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는 185톤이나 되는 시멘트를 들이부었다. 당대에는 최선의 재료였을지 몰라도 문화재 보수에 시멘트가 적절한가부터가 의문이다.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결 없이 시멘트를 들이부었다고 해서 붕괴가 멈출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시멘트는 붕괴의 진행은 막지 못한 채 오히려 탑신을 짓누르는 원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비극의 본질적인 책임은 세월에 있다. 아무리 돌이라지만 1300여 년을 오롯이 견디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썩기 쉽고 불타기 쉬운 목탑보다야 오래 가겠지만 세월의 풍화작용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래되면 될수록 문화재의 가치는 높아지겠지만 그 오래된 시간이 외려 문화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무게이기도 하다. 후백제,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지만 결국 전면 해체 후 보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면밀한 조사 끝에 신중하게 내려진 결정이니 이를 반대할 이는 드물 것이다.
 그리하여 20년 만에 덧집을 벗어버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두고 말들이 많다. 문화재는 추정보수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니 전체의 모습을 완전히 복원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 깨지고 갈라진 돌로 복원을 한다면 복원 시점부터 다시 붕괴가 시작될 터이니 그 돌이 보수된 탑 밖에 나뒹굴고 있다는 비난도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원형을 얼마나 잘 보존했는지, 공법은 적절했는지, 층별 보수 방법이 일관성이 있었는지 등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니 말을 보태기는 어렵다.
 그러나 본래의 돌과 새 돌을 정교하게 이어붙이고 균열이 진행될 돌을 적절한 충진재로 보수해서 다시 쓴 것을 문제 삼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아니다. 살릴 수 있는 돌은 살려야 하니 동원될 수 있는 모든 기술이 동원되었다. 기계로 깎은 돌이 아니니 일일이 울퉁불퉁한 면에 맞춰 새 돌을 깎고 그것을 신소재 재료로 이어 붙였다. 그것이 티타늄 임플란트로 표현되고, 그 재료가 에폭시 필러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미륵사지 석탑은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졌고, 그 탑의 보수 역시 당대 최선의 기술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 올바르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보수가 한창이던 2014년 여름, 보수작업을 위해 씌워 놓았던 덧집 안에 들어가 보수과정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보수 과정과 방법에 대한 담당자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경외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모든 과정이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었지만 세상의 어떤 전투보다도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체 작업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각종 유물 또한 놀라움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감히 비기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잘것없이 보일 수도 있는 먹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사 현장에서 직선을 그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먹줄을 튕기는 것이다. 먹을 듬뿍 먹인 실의 양쪽을 잡고 나무나 돌에 튕기면 반듯하고도 선명한 직선이 남는다. 1300여 년 전 석수의 손에 의해 그어진 먹선이 방금 튕긴 듯 돌 위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탑을 이루는 웅장한 돌들보다 그 위에 남겨진 선 하나가 더 선명한 인상이 되어 남았다.
 미륵사지 석탑을 보노라면 백제가 떠오른다. 백제가 마지막 찬란한 빛을 내뿜던 무왕 시절이 떠오르고, 무왕을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만든 선화공주와의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흐름은 결코 뿌듯하지만은 않다. 왠지 모를 쓸쓸함이 몰려오는 이유는 백제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 때 백제의 운명이 다했으니 무왕의 치세가 아무리 훌륭했다 할지라도 결국 마지막 불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백제를 떠올리노라면 자연스레 그 탑이 서 있는 땅 익산이 눈에 들어온다. 너른 평야와 알맞은 물줄기를 간직한 땅은 한 나라의 왕궁이 들어설 만하다. 충청도 땅을 지나 남쪽으로 가다 보면 첫 번째로 만나는 곳이 익산이니 교통의 요지이다. 누군가는 1977년의 이리역 폭발사고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벌써 40여 년이 흘렀으니 마음속의 상처 외에 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1300여 년 전의 왕궁 터이니 다시금 도약할 일만 남은 땅이다.
 전면적인 보수를 마치고 새롭게 선보인 미륵사지 석탑은 익산의 새로운 도약의 원동력이자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300여 년 전의 영화 위에 굳건히 발을 딛는 것으로 출발을 삼을 만하다. 과거의 영화와 단절돼 있다면 그 과거 위에 익산의 새로움을 심어 넣는 것도 방법이다. 균열이 있다면 든든한 충진재로 채우는 것도 좋다. 혹시라도 낡아서 못 쓸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좋다. 찬란한 과거 위에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과정이라면 티타늄 임플란트도, 에폭시 필러도 문제될 것은 없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과연 역사적 사실이고 쌍릉의 주인공이 이들인가 의심하는 이가 있다. 익산에 과연 백제의 왕궁이 있었는지, 이 땅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될 만한지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문학에서 다룰 일이고, 쌍릉의 주인 또한 발굴과 조사를 통해 가려낼 일이다. 익산이 한 나라의 수도였는지, 또는 그럴 만한지에 대해서도 역사 연구가 가릴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논쟁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다른 어떤 지역의 땅도 이러한 천년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왕궁의 터를 간직한 곳도 드물고, 한 나라의 수도가 될 만한 입지를 갖춘 곳도 드물다. 익산은 이 둘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것도 천년의 먹선을 따라 올곧고도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다.

  한성우 교수(인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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