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역 앞 평화의 소녀상 사진 : 손수빈 수습기자

  지난달 14일은 위안부 기림의 날이었다. 매년 8월 14일마다 돌아오는 위안부 기림의 날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특히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일을 시작으로, 2017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해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라는 명칭은 어떻게 불리기 시작했을까?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의 의미는 일본군에게 성적 '위안(慰安)'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당시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들을 '예기(藝妓), 접객부, 기녀' 등 갖가지 명칭으로 불렀는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대체로 위안부라는 말로 수렴됐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부터 1945년 일본 패전까지 일본 정부는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구실로 그때 당시 점령지였던 우리나라와 일본(오키나와) 등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 전반을 관리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창설과 여성들의 모집 그리고 그 운영의 주체는 모두 일본 정부였다. 위안소에는 식민지, 점령지, 일본 본토 등에서 많은 여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동원됐고 이들은 일정 기간 감금돼 강간, 고문, 구타, 강제 낙태와 성행위 등 참혹한 고통을 강요당했다. 여성을 강압적으로 동원해 집단적인 성폭력을 가했고, 당시 피해 여성들의 삶은 마치 '노예'와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 위안부라는 단어는 지극히 가해자 중심의 용어이며 폭력성과 강제성을 감추는 부정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고, 모집 동기와 과정, 폭력성을 고려한다면 일본군 '성노예'라는 명칭이 적합하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위안부라는 용어가 문제의 본질을 밝히기에 적합하지 않아도 일본군 '성노예'라는 용어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제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만들어가며 제도화했던 당대의 상황을 전달해 준다는 점과 피해자들이 자신을 '성노예'로 부르는 데에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국 정부가 제정한 법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덧붙여 일부에서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위안부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작은따옴표를 붙여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반세기 동안의 노력
우리나라와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특히 '우리 국민의 재산, 이익, 권리에 대한 청구권에 대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한다'고 청구권 협정을 맺게 됐으며,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와 조약을 통해, 5억 달러를 보상받았다.
그러나 이 협정 가운데 위안부 불법행위에 대한 보상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1965년 이전에 벌어진 위안부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때문에 당시의 한일기본조약에서는 위안부에 대해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보상으로 받은 5억 달러 중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없었다.
이후 일본에 맞서 우리 정부는 '당시 위안부 문제는 포함이 안 됐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최종적으로 다 해결된 것이다'라고 반박하며, 지금까지 진전이 된 것이 없었다.
이렇게 잊혀질 것만 같았던 우리나라의 어두웠던 위안부 실상은 1988년 윤정옥 교수의 주장으로 수면 위에 드러나게 됐다. 윤정옥 교수는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성매매 관광을 하는 것'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고, 이후 위안부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2년 1월,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한일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했을 당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그것이 지난달 14일 1,400회를 맞이한 '수요집회'이다. 이 수요집회는 현재 동일한 주제로 열린 최장기간의 시위로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또한 수요집회가 천 회를 맞이했을 때, 오늘날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불리는 소녀상이 등장했다. 이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잊지 말고,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인류 역사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할머니들의 아픔을 창의적 예술 정신으로 제작한 것이다.
현재 평화의 소녀상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관심을 받아, 국내와 더불어 세계 각지에도 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대학의 연고지 지역에 해당하는 익산역 앞에도 2년 전 그분들의 아픔을 영원히 잊지 않고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지난달 14일 익산에서는 제2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총 814개의 핸드메이드 목각 평화의 소녀상을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텀블러와 교환해주며, 그분들의 정신을 잇는 행사를 진행했다.


그분들의 해방을 위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됐지만, 그분들은 아직도 해방되지 못 했다. 죄의식과 수치심은 위안소 밖에서도 그들을 아프게 했다. 아픔의 무게를 누구에게 나눌 수 없이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누구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숨고, 그렇게 반세기가 지났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마침내 그분들은 용기를 냈고,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28년이 지난 현재, 위안부 피해 할머니 생존자는 이제 20명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지금도 그들을 외면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1일 일본의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된 평화의 소녀상이 사흘 만에 전시가 중단된 사건도 우리를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 정부의 만행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 지역을 오갈 때 항시 볼 수 있는 평화의 소녀상. 그분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손이라도 잡아주는 것은 어떨까?

윤진형 기자 kiss7417@wku.ac.kr

손수빈 수습기자 ssb9986@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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