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 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이 번호에는 지난 2일 진행된 <글로벌인문학> 셰익스피어에 관한 열네 가지 의문 중 첫 번째와 다섯 번째를 발췌하여 싣는다. 

/편집자

 

 
  셰익스피어 작품의 매력과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홀리 크로스 대학교 헬렌 월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미국에는 140개가 넘는 셰익스피어 축제 극장이 있으며, 90%가 넘는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정신 수양과 인격 완성을 위한 최고의 교본이기 때문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 얀 콧트 교수는 1961년 "셰익스피어는 우리들의 동시대인"이라는 책을 냈다. <햄릿>에 관한 글에서 그는 말했다.
 <햄릿> 연구 논문 목록을 작성하면 바르샤바 전화번호부의 두 배나 된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햄릿은 책에서 빠져나와 무대를 거쳐서 우리들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햄릿은 누구에게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치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그림인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와도 같다. 작품 <햄릿>은 지금 우리들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제는 시대와 나라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 다루는 선과 악, 권력, 운명, 사랑, 죽음, 폭력, 탐욕 등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예술적 표현은 관객을 압도하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희곡에 담기 위해 여러 문화권에서 방대한 양의 전설, 신화, 역사, 종교, 과학 등의 지식을 탐색하고 유익하게 사용했다.
 성경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작품이 연극, 오페라, 발레, 영화, 소설, 뮤지컬, 미술, 음악 등에서 새롭게 탄생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셰익스피어의 매력과 재미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1) 작품의 다양성과 복합성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그의 작품은 그 시대와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꿰지 않고, 갈지 않고 버려둔 보석"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술적 가능성이 무한하고, 끊임없는 도전이 감행되고 있다.
 (2) 탁월한 극작기술 때문이다. 재미나는 이야기, 충격적인 사건의 전개,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의 묘사 등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이 지닌 사상이 인생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3) 언어의 마술적 기능 때문이다. 대사의 아름다움, 박진감, 황홀감, 신비로움은 잊을 수 없는 예술적 체험이 된다. 그의 언어는 기지에 넘치고, 유머가 풍부하며, 통상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 친근한 것과 요원한 것이 절묘한 배합을 이루기 때문에 감각적인 충격을 촉발시킨다. 그런 체험은 한마디로 언어의 무지개를 보는 황홀감이다.
 1996년 9월 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에 놀라운 기사가 났다. "원래의 글로브 극장이 문을 연지 300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 현대판 글로브 극장이 재현되다"라는 윌리암 몬탈바노 기자의 리포트였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15세 미국 소년의 소감과 함께 <베로나의 두 신사> 개관기념공연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셰익스피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 세계에서 용기와 영감, 그리고 도덕적 교훈과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셰익스피어는 숫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첫째 의문은 셰익스피어의 실체와 시대상(時代相)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그의 작품에 대한 무궁무진한 해석에 관한 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비극인데,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 <오셀로>, <줄리어스 시이저>, <헨리 5세>
 베니스 지중해총사령관은 무어인 오셀로 장군이다. 부관으로 임명될 것이라 기대했던 이아고는 캐시오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오셀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고 있다. 오셀로 장군은 원로원의원 브러밴쇼의 딸 데스데모나를 사랑해서 결혼했다. 데스데모나를 사모했던 이아고는 이 일에도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터키군 함대가 베니스 영토 키플로스 섬을 침공하는 위기에 직면해서 오셀로는 전선으로 출진한다. 데스데모나와 이아고도 함께 간다. 데스데모나를 짝사랑하는 로더리고는 값진 선물로 데스데모나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이아고의 간계에 휘말려 돈 보따리 들고 그도 키프로스 섬으로 출발했다.
 이아고는 오셀로 장군에게 부관 캐시오가 데스데모나의 정부라고 고자질한다. 승전 축하의 밤, 이아고의 계략으로 경비책임자 캐시오는 만취상태가 되고, 치안은 혼란해져서 싸움판이 벌어지자 격노한 오셀로는 캐시오 부관을 면직한다. 이아고는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데스데모나에게 구명 요청을 하라고 부추겨서 캐시오는 데스데모나를 만난다.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에게 부관의 복직을 부탁한다. 이아고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셀로에게 귓속말로 캐시오와 데스데모나 사이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오셀로는 순간, "아, 그렇구나"라고 의심한다. 아내가 캐시오를 위해 열나게 탄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아고는 결정적인 책략을 꾸며낸다. 자신의 아내 이밀리아에게 부탁해서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입수해서 캐시오 방에 떨어뜨린다. 이 손수건은 오셀로가 아내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이아고는 오셀로에게 캐시오가 그 손수건을 애용하며 잠 고대로 "사랑하는 데스데모나"라고 말했다고 일러바친다. 오셀로의 질투심이 깊어진다. 공교롭게도 이아고의 흉계로 오셀로는 캐시오가 비앙카와 만난서 애정을 나누는 것을 멀리서 보고 데스데모나와의 밀회라고 착각하해서 분노는 극도에 도달한다. 이밀리아가 오셀로에게 부인의 결백을 호소해도 오셀로는 믿지 않고 막무가내로 부인의 부정을 다그친다. 데스데모나는 사태가 이렇게 진전된 것을 보고 절망한다. 질투의 화신이 된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침실로 들어가서 아내를 살해한다. 이후, 오셀로는 손수건이 어떻게 캐시오 손에 넘어갔는지 자초지종 설명을 이밀리아로부터 듣고 모든 것이 이아고의 음모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후회와 통곡 속에서 오셀로는 자결한다.
 이 작품은 소통의 부재가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 알리고 있다. 리어왕도 효녀 코델리아와 올바른 소통을 갖지 못하고 두 딸의 위선과 배신으로 권좌를 잃고 코델리아의 비극적인 죽음을 마지하며 통한(痛恨)의 생을 마감했다. <겨울 이야기>의 시칠리아왕 리온티이즈와 보헤미아왕 폴릭시니즈는 소통부제로 우정은 깨지고, 레온티이즈의 아내 하이마이오니는 정절을 의심받고 죽음에 직면하며, 죄 없는 딸 퍼디타는 광야에 버려졌다.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는 <줄리어스 시이저>와 <헨리 4세>에서 그 본질을 보여줬다. 서양의 영웅을 거명하면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시이저이다.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고 장담했고, 알렉산더 대왕은 야습을 권했을 때,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시이저는 루비콘을 건널 때, "주사위는 던져 졌다"라고 말했고, 브루터스에게 암살당할 때, "브루터스, 너 마저도?"라고 탄식의 소리를 질렀다.
 시이저(로마 이름은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에사르)는 기원전 102년에 태어났다. 그 시대는 로마 전성시대였다. 로마는 공화제였다. 웅변가였던 시이저는 대중을 존중해서 민심을 얻었다. 그는 정치적 판단력이 탁월했다. 그는 수사학과 변론술을 연마해서 대중을 감동시켰다. 자신의 결혼과 딸의 결혼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공공시설을 확충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연희활동을 지원해서 민심을 얻었다. 전리품의 분배도 사심 없이 관대했다. 고대의 전쟁은 무역과 산업 활동이 함께진행되어 군인들 뒤로 상인들이 따라갔다. 승전국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시이저는 이기고, 벌어드리고, 나누어 가졌다. 그는 갈리아지방을 평정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영웅으로 개선(凱旋)했다. 갈리아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되며 8백의 도시를 점령하고, 3백에 달하는 민족들을 귀순시켰으며, 도합 3백만의 적을 상대로 백만을 죽이고, 백만을 포로로 잡았다.
 시이저의 명성이 높아지자 원로원이 시이저를 경계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원로원에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받은 시이저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서 정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집트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암살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로마의 위성국(衛星國) 여왕으로 거느린 그는 전권을 장악하고 종신제 '딕타토르'(독재자)로 취임했다. 이때가 로마공화제의 위기였다. 원로원에서 브루터스 일파가 이런 사태를 염려하면서 시이저 암살을 기도했다.
 <줄리어스 시이저>의 내용을 보자.
 1막은 로마 시내이다. 시이저 개선 행진이다. 시민들은 시이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시이저는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민중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캐시어스와 브루터스는 반대였다.
 2막. 밤늦게 캐시어스 일파들이 브루터스 집에서 시이저 암살을 모의하고 있다. 3월 15일 시이저가 의사당에 올 때 결행하자고 결의한다. 시이저 집에서는 아내가 시이저의 외출을 가로막는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이다. 시이저의 측근 학자가 암살음모를 탐지하고 경계심을 전하는 서신을 들고 왔지만 시이저는 그 내용을 보지 않았다. 시이저는 암살을 피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시이저는 의사당으로 출발했다. 소통의 부재였다.
 3막. 시이저가 의사당에 도착하자 암살범 중 한 사람이 그의 앞에 엎드려 탄원을 했다. 그 와중에 암살이 거행되었다. 브루터스는 시이저 암살은 압제 타도와 자유 쟁취를 위한 행위였다고 연설하고 민중으로부터 "브루터스 만세"라는 환호를 이끌어내었다. 이윽고, 로마광장에서 시이저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브루터스가 먼저 연단에 올랐다. 그는 "시이저를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시이지의 살해는 로마를 더 사랑한 정의(正義)였다"고 강변(强辯)했다. 시민들은 브루터스의 연설에 찬동하며 "브루터스 만세"를 외쳤다. 안토니는 연설 시작에서 이들의 암살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시이저의 업적만을 찬양했다. 그는 시이저의 유언장을 찔끔 흘렸다. "시민 여러분은 시이저의 유언을 알면 미칠 듯 흥분할 겁니다. 로마시민 에게 75 드라크마씩 유증한다는 내용입니다." 시민들은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암살자를 끌어내려라. 복수다"라고 격분하면서 반항하자 형세는 역전되었다. 브루터스는 순식간에 로마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브루터스와 적대관계였던 안토니는 여세를 몰아 옥티비어스와 손잡고 반(反) 브루터스 전선을 구축했다.
 5막이다. 필리바이 전쟁터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안토니와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캐시어스가 자결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패배를 자인한 브루터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 2회 삼두정치를 지나면서 옥타비어스와 안토니가 분열되어 적대관계가 되었다. 안토니는 이집트로 가서 클레오파트라와 손잡고 연합전선을 펼쳤지만 패배했다.
 현명하고 이성(理性)적인 리더십만이 조직을 확실하게 끌어나갈 수 있다. 빈약한 리더십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 있어도 배신자와 반대진영의 음모로 해체되고 무너진다. 유언장에 시이저의 양자로 지명된 옥타비어스는 로마황제가 되었다. 이 시점이 고대 로마제국의 시작이었다. <줄리어스 시이저> 속편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1606년에 발표되었다. 안토니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다룬 로마사극으로서 4대 비극 이후 셰익스피어의 숙성된 극작술이 발휘된 명작이다. 셰익스피어는 실패한 군주들의 허약한 리더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사극(史劇)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왕세자인 조카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반란으로 전사한 리처드 3세,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 햄릿 왕자에게 살해당하는 클로디어스,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맥다프에게 살해당하는 맥베스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헨리 4세도 훌륭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헨리 6세는 생후 9개월에 왕위에 오르고 장미전쟁에 패(敗)해서 폐위(廢位)되었다가 왕위에 복귀했지만 무기력한 영도력으로 퇴위(退位)당하고 런던탑에서 옥사했다. 그는 연약한 인물이었다. 13세기 초에 왕위에 오른 존 왕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양위(讓位) 협박을 받는 무능한 군주였는데 결국 수도사에게 독살 당했다. 리처드 2세는 국왕의 특권을 남용해서 국민의 불만이 거세지자 볼링브로크(후에 헨리 4세)에게 패하고 사멸했다.
 헨리 5세는 지혜롭고, 전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웅변가요, 전략가로서 국민의 추앙(推仰)을 받은 위대한 왕이었다. 헨리 5세는 우선 지도자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민첩하고, 용기와 정략, 그리고 인내심과 독창성을 발휘했다. 배신자는 처형했다. 왕에게 불복정하고, 부정한 일을 하면 절친해도 극형에 처했다. 이른바 나쁜 씨앗의 제거였다. 매사에 치밀하고, 행동은 단호했다. 열세였던 영국군을 이끌고 프랑스 아진코트 전투에서 프랑스 대군을 격파했다. 헨리 5세는 전투 전날 밤, 사병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전세를 살피고,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전략을 짰다. 병사들은 한 때 불안감에 위축되어 헨리 왕을 의심했다. 전투하는 날 아침, 그는 명연설을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일으키고, 투혼(鬪魂)을 심었다. 연설의 핵심은 동기 유발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가?"였다. 헨리 5세는 승리로 얻게 되는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는 승리가 당연하다고 자신만만했다. 그의 확신은 사병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는 사병들과 지휘관들을 결속시키며 단합된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리더는 절대로 혼자서 일을 할 수 없다. 사람이 조직의 중요한 자산이고 성공의 열쇠이다. 헨리 5세는 그 원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리더는 소용돌이와 같아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는 자신의 수례바퀴에 수천만의 운명이 매달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리더가 망하면 모두가 망하고, 리더가 성공하면 모두가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주변에 철저히 알렸다. 이런 모든 일이 헨리 5세 리더십의 본령(本領)이었다.
 
  이태주 교수(영문학자, 예술공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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