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유신 시대라는 것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유신 헌법 아래 온 국민이 옥죄여 살던 시절. 
 유신 헌법이 생긴 1972년부터 박정희가 부하의 손에 살해된 1979년, 이어서 전두환 군사정권이 나라를 장악한 1980년까지. 그 어간에 잡지 <뿌리깊은나무>가 있었고, 한창기라는 한국인이 있었다.
 
 
 곧 망할 것 같았던 잡지
 <뿌리깊은나무>는 1976년 3월호로 창간했다. 창간호가 나오자 이 책의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고 예상한 이들이 많았다. 여러 이유 중에 '한글 전용'이 첫손에 꼽혔다. 어린이 책도 아니고 어른을 대상으로 돈 받고 팔자는 잡지가 한글전용으로 나온 것이 대한민국 역사에 처음이었다. 
 1948년 10월 9일 국회는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라고 선언한 법률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당분간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단서 조항에 밀려 만든 지 30년이 다 되도록 잊혀져 있었다. 한글전용은커녕 해가 갈수록 국한문 혼용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한창기라는 좀 이해하기 힘든 사람
 나는 1975년 9월 <뿌리깊은나무> 창간을 준비하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그때까지 발행인 한창기는 한국 출판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도 그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파는 장사꾼으로나 알았지 출판인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그는 영어를 잘했다. 중학교 때부터 한밤중에 단파 라디오로 '미국의 소리'를 들으며 익힌 실력이라고 했다. 그 영어로 미8군 부대 안에서 미군들에게 비행기표, 영어 성경,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파는 세일즈맨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미군 상대는 그만두고 한국인들애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파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그는 영어만이 아니라 한국어에도 통달한 사람이었다. 우리말과 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문장을 구사했다. 문법이나 어법에서도 국어학자들과 토론해서 밀리지 않을 만큼 공부가 깊었다.
 
 한글 창제 530년 만의 사건
 잡지 <뿌리깊은나무>는 한글 창제 530년 만에 처음으로 훈민정음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해 나온 공문서다. 중국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공공의 문서. 
 한창기는 세종대왕의 뜻을 따라 백성들이 두루 쉽게 접할 수 있는 읽을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한글전용으로 책을 꾸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국한문 혼용의 역사가 긴 데서 온 한계였다. 한글 표현에 익숙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교수나 전문가 중에 우리말의 어법이나 문법을 정확히 알고 글을 쓰는 이가 적었다.
 
 한글전용 잡지의 글을 다루는 태도
 방송과 인터넷 매체들이 득세한 지금과 달리 신문이나 잡지 같은 활자 매체의 힘이 크던 시절이었다. <뿌리깊은나무>는 한국의 사회, 문화, 예술, 환경, 교육의 관심사를 다루는 매체였다. 앞서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경쟁지들에 비해 부피가 3분의 1 수준이면서도 값은 같이 받았다. 
 이런 사정으로만 보자면 잡지는 당연히 수명이 짧아야 했다. 그러나 시장의 예상과는 달리 <뿌리깊은나무>는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안 지나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잡지가 되었다. 
 책은 잡지든 또는 다른 무엇이든지 거기에 담긴 내용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야 한다. <뿌리깊은나무>도 당연히 내용에 공을 들였다. 그러면서 내용과 함께 표현에도 공을 들였다. 이 점에서 다른 경쟁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우선 책의 시각 표현에 현대식 디자인 개념을 적용하였다. 이를테면 표지부터 본문까지 지면 하나하나가 세련되고 짜임새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장 표현이 남달랐다. 
 잡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장 표현에 공력을 가장 크게 들였다. 한글전용을 하되, 각 분야 전문가들이 쓴 글들을 편집실 안에서 모두 손질해서 막힐 데 없이 쉽게 잘 읽히도록 만들었다. 그로써 처음에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한글전용이 약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나타났다. 
 '소집 발령시 제복을 착용하고 운동장에 집합해야 한다'를 '소집 명령이 나면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인다' 하면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런 것이 <뿌리깊은나무>가 한 한글전용의 보기이다. 
 한자어를 배격하자는 주장은 물론 아니다. '이유가 나변에 있는가?'의 '나변'처럼 어렵게 들리는 말은 골라내었다. 평소 언어생활에서 보통으로 쓰이는 입말이면 한자어라도 우리 언어의 소중한 자산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어휘보다는 어법을 바로잡는 것에 힘을 썼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부사나 형용사 같은 문장 요소들의 위치를 바로잡는 것을 글다듬기의 기본으로 삼았다. 만약에 한자를 단순히 한글로 바꾸어서 내놓기만 했다면 책은 죽은 문자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문장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고치고 어려운 표현을 쉬운 표현으로 고쳐서 내놓았기 때문에 독자, 특히 젊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어린 백성과 민중 또는 한글과 민주주의
 나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한글전용이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했다. 중국 문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의 정신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학문이 모자라는 사람도 남의 생각을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고, 재주가 뒤지는 사람도 제 생각을 쉽게 펼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한글은 그러한 도구로서 민주주의의 실천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책 속에서 '민중'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민중'의 관심사, 민중의 권리 의식을 일깨우는 기사들을 다달이 빼지 않고 실었다. 그로써 젊은 사람, 특히 학생이나 근로자들에게 공공의 관심사, 사회 갖가지 쟁점들에 의견을 가지는 계기들을 줄 수 있었다.
 잡지 1978년 7월호는 "대한민국 헌법은 뜻이 이렇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7월은 제헌절이 있는 달이다. '헌법의 쉬운 풀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기사는 그 시절의 이른바 유신 헌법을 '전문에서 시작해서 본문 126조 그리고 부칙 11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장에서 한문을 벗겨내고 한글로 풀어써서 보여 주었다. 
 고쳐 쓴 헌법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9조 1항)
 모든 國民들은 法 앞에 平等하다. 누구든지 性別 · 宗敎 또는 社會的 身分에 의하여 政治的 · 經濟的 · 社會的 · 文化的 生活의 모든 領域에 있어서 差別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아무도 그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종교가 무엇이든지, 또는 사회에서 지니는 신분이 무엇이든지,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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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3조 2항)
 大統領은 第1項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이 憲法에 規定되어 있는 國民의 自由와 權利를 暫定的으로 정지하는 緊急措置를 할 수 있고, 政府나 法院의 權限에 관하여 緊急措置를 할 수 있다.
 →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임시로 정지시키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도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인용한 두 조항 중에 앞엣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밝히고 있으나, 뒤엣것은 그 기본권을 정부가 아무 때나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글로 풀어씀으로써 독자들에게 '유신 헌법'이 어떤 독소를 가졌는지 쉽게 알아보기를 바랐다.
 <뿌리깊은나무>의 한글전용은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비판하자면, 이불 밑에서 지르는 고함 같은 존재감 떨어지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에 이어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은 1980년 7월호를 끝으로 이 잡지를 '폐간 조치'해 버렸다. 같은 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씨알의 소리>도 문을 닫게 되었다. 모두 젊은이들이 많이 읽는 잡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뿌리깊은나무>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속절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진 자리에 폭탄 자국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이 잡지가 남긴 것들이 있었다. 가장 뚜렷이 눈에 띄는 것이 역시 '한글전용'이다. 
 <뿌리깊은나무>는 한글전용이 얼마나 힘있고 쓸모있는 물건인지 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활자 매체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문 혼용이라는 오래된 낡은 옷을 벗고 새옷으로 갈아입을 용기를 주었다. 이 단명한 매체가 사라진 뒤 1980년대를 지나며 온 나라에 한글전용이 퍼졌다. 먼저 출판사들이 앞장섰고, 이어서 잡지들이 교양지, 전문지 가릴 것 없이 뒤를 좇았다. 이윽고 콧대를 세우고 버티던 신문들이 속속 한글전용으로 갈아탔다. 이로써 이 땅의 언어생활에서 국한문 혼용 시대가 끝나고 한글전용 시대가 열렸
한창기<뿌리깊은 나무>발행인
다.
 한글전용은 동시에 가로쓰기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한자는 예부터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국한문 혼용도 이를 따랐으나 그것이 깨어졌다.
 한창기는 1997년 2월 초 이승을 떠났다. 예순하나, 젊어서부터 몸 안에서 불화를 일으켰던 '간'이 끝끝내 말썽이 되었다. 
 이른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그.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이 많다. 잡지 <뿌리깊은나무>와 한글전용만이 아니다. 그는 우리 전통문화, 전통예술의 모든 면에 걸쳐 굵은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순천시 낙안읍성 앞에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다. 거기서 그를 만나보기를 권한다.
 
 
김형윤(김형윤편집회사 대표, 전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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