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트 히어로

안지영(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과)
 
 연조는 아무도 자신에게 바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낡은 아파트 사이를 뛰어넘거나 차에 치이고도 멀쩡하게 달리고 주먹만으로 악당을 때려잡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연조에게 주어진 역할은 몸에 딱 달라붙는 분홍색 쫄쫄이를 입고 거대한 분홍색 칼을 휘두르는 일이었다. 그 역할을 받게 된 것도 운이 좋았다. 어린이 전대물에서 핑크를 맡은 하영과 체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제안받았다. 연조는 촬영이 끝난 뒤 전철을 탈 때면 이상한 기분에 잠기고는 했다. 방금 전까지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인의 지하철 테러를 막았지만 지금은 퇴근길의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도 연조가 히어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연조는 재작년부터 언니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렇지만 작년에 찍은 뒤로 내내 거실 중앙에 있는 가족사진 안에는 없다. 새벽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연조는 신발을 벗으며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언니와 형부, 조카를 마주한 채로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연조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접혀있는 언니의 눈을 바라봤다. 일종의 연습이었다. 중학교 때 언니가 자신의 눈을 먼저 피한 이후로 연조는 언니를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언니의 웃음기 없이 관찰하는 시선을 마주하면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오늘 저녁에는 피할 수 없을 예정이었다. 연조는 지난 밤에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너, 언니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 연조는 내내 시선을 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말없이 연조를 살피던 언니가 말을 이었다. 승연이 말이야, 입을 열었던 언니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도로 입을 닫았다. 내일 저녁에 다시 얘기하자. 언니는 그 말을 끝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연조는 언니의 사진을 눈싸움이라도 하듯 바라보다가 안방에서 핸드폰 알람이 울리자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가 출근했다 돌아올 때까지 사진 앞에서 눈을 바라보는 연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낮에 갑작스럽게 약속이 잡힌 탓이었다. 연조는 지난 촬영이 끝난 이후로 오랜만에 전철을 탔다. 작년에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뒤 한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는 하영에게서 온 문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저 하영인데, 지금 안 바쁘면 만나고 싶어요. 여의도로 올래요?
 문자마저 하영다웠다. 하영은 상대에게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던졌다. 그런 모습은 촬영 때에도 연조를 불편하게 만들고는 했다. 여의도면 한 시간은 걸리는데요. 그런데도 연조가 하영에게 답장을 보낸 건 그동안 미정 상태였던 후속작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영이 스턴트 배우인 연조를 개인적으로 부를 이유는 그것 말고는 없었다. 답장은 빠르게 왔다. 상관없어요. 연조는 급하게 겉옷만 입은 뒤 집을 나섰다. 이모 잠깐 나갔다 올게. 혼자 있어도 괜찮지, 연조가 외치자 올해 여덟 살인 조카 승연이 손을 흔들며 받아쳤다. 내가 애도 아니고 혼자 못 있을까.
 밥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고, 둘이서 밥을 먹을 만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연조는 핸드폰으로 무의미한 여의도 맛집을 검색했다. 무분별하게 나열된 식당 중 어떤 곳에서도 하영이 연상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영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자신이 그려지지 않았다. 막상 하영을 만나기 위해 전철을 타고 가자니 후회되기 시작했다. 집에 혼자 있을 승연도 걱정됐고, 하영을 만나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녁에 얘기 좀 하자는 언니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연조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연조는 지난 촬영 이후로 한강을 지날 때면 저도 모르게 외계인의 침략을 상상했다. 은하 어딘가의 어두운 별에서 온 외계인은 전철을 한 손으로 쥐고 시민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지구를 조종하려 하기도 했다. 연조는 창가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강에 노을이 지면서 얼굴에도 분홍빛이 돌았다.
 물에서 솟아오르는 괴수에 대한 상상은 곧 지구가 위협받을 때 나타날 용사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레드나 블루보다 먼저 떠오른 건 핑크였다. 분홍색 쫄쫄이 위에 미니스커트를 겹쳐 입은 핑크는 다리를 뻗을 때마다 치마가 걸리적거렸다. 지난 여름에는 달라붙는 의상 때문에 생긴 땀띠로 내내 고생했다. 헬멧처럼 머리 전체를 감싸는 마스크 안에서 연조는 자주 인상을 찌푸렸고, 욕을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촬영은 매번 악당에게 맞고 쓰러졌다가 다 함께 물리치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연조는 핑크였지만 그럼에도 핑크를 생각하면 자신의 얼굴보다 하영이 먼저 떠올랐다.
 함께 핑크를 맡았던, 정확히는 핑크의 맨 얼굴을 맡은 하영은 아역배우 출신이었다. 연조보다 어리지만 연기 경력은 십육 년 차로, 나름대로 연차가 있는 배우였다. 하영은 한때 발랄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지만 새로운 아역들이 등장하며 조용히 밀려났다.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무명 배우도 아닌 하영은 이따금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이름이 언급되었다가 빠르게 잊히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에게 명랑한 아역으로 기억되는 하영과 연조가 만난 하영은 텔레비전으로 보던 것과 간극이 컸다.
 하영의 실물을 본 건 어린이 드라마 첫 미팅 때였다. 미팅자리에 간 연조가 감독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영이 도착했다. 얼굴을 보니 어릴 적 봤던 사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아역으로 나왔던 게 기억났다. 그때 그 얼굴이 얼핏 보였다. 소 눈처럼 크고 순해보이는 눈에 하얗고 작은 얼굴의 하영은 연조보다 조금 더 작고 말랐지만 몸집은 비슷했다. 야구모자를 쓰고 후드집업을 걸친 하영의 한 손에는 대본이, 다른 손에는 커피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연조는 생경한 기분으로 잠시 하영을 바라봤다. 하영은 인사하며 들어와 감독에게 커피를 건넸다. 연조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제작진과 배우들의 소개가 끝나자 감독이 말했다. 연조 씨, 크게 어려울 건 없어. 달리거나 구르는 정도니 괜찮지? 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치는 것보다야 안 다치는 게 나을 터였다. 게다가 전대물 드라마는 한 번 찍으면 후속편이 빠르게 제작되는 편이라 제작진의 눈 밖에 나지만 않으면 꽤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감독은 고개를 돌려 하영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영 씨, 대본 읽어서 알죠. 무술가 집안의 막내딸, 당차고 귀여운 스타일. 하영 씨 전문이잖아. 액션 신을 그쪽 전문인 연조 씨가 하고. 베테랑들만 잘 모았다니까. 미팅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때 하영이 물었다.
 그럼 제가 하는 건 뭔가요?
 모두가 하영을 주목했다. 하영은 차분하게 한 번 더 물었다. 그래서 제가 하는 건 뭐예요? 감독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영 씨는 가끔 이런다니까. 뭐긴 뭐야, 연기지. 모두 감독을 따라 웃었다. 연조는 하영을 바라봤다. 하영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문득 연조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영이 고개를 들어 연조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연조가 먼저 어색하게 눈을 피했을 때, 하영도 감독을 따라 웃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처럼 그늘 하나 없는 웃음이었다.
 하영과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연조는 지금도 어딘가 껄끄러웠다. 달리다가 넘어졌을 때 입안으로 흙먼지가 들어오는 것처럼 입이 텁텁했다. 감독에게는 나름 싹싹하게 굴던 하영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흙먼지가 입에 들어와도 헹궈낼 시간 없이 다시 달려야 했던 것처럼, 연조는 하영의 질문을 생각 저편으로 넘겼다. 줄지어 선 사람들을 따라 환승을 하러 가며 이미 지난 일이라며 애써 지웠다. 저편에 던진 기억들이 넘쳐 다시 돌아오고는 했지만, 연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영은 담당 매니저 없이 다녔지만 이따금 스케줄이 비는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와 촬영장에 나타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하영이 커피를 사는 날이기도 했다. 커피 캐리어를 든 매니저들은 하영의 뒤를 따라 촬영장으로 들어왔다. 첫 미팅 이후로 하영을 살피게 된 연조는 하영이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보다 차분하며, 차분하다 못해 음울하기까지 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조가 보기에 하영은 매번 맡는 역할들의 발랄함을 피곤해하는 사람이었다.
 개인 촬영이 먼저 끝나면 하영은 구석에 서 다른 배우의 연기를 지켜봤다. 조명도 없는 곳에 입을 다물고 서 있는 하영은 촬영 때와 달리 존재감이 흐릿했다. 지나가던 스텝이 우두커니 서 있는 하영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일도 있었다. 카메라를 마주하지 않을 때의 하영은 늘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고, 다른 배우나 스텝들이 말을 걸어도 대화는 금방 끊겼다. 말을 건 사람들은 민망한 얼굴로 돌아서고는 했다. 촬영장에서 하영의 얘기가 도는 건 순식간이었다. 배우보다 스텝들 사이에 끼어있는 일이 더 많은 연조 역시 하영의 소문을 들었다. 완전 여우야, 연조 씨도 알지? 하영의 대역이니 더 잘 알겠다는 말투에 연조는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때만큼은 가면을 쓰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촬영이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도 하영은 사람들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연조조차 몇몇 스텝들과 언니동생하며 허물없이 지냈는데, 하영은 항상 혼자였고 말수도 적었다. 그렇지만 감독에게만큼은 연기의 연장선처럼 활발하게 굴었다. 그런 하영이 감독의 촬영방식에 토를 단 적이 있었는데, 연조가 매번 괴수에게 맞고 땅에서 구를 때였다. 구르고 있으면 레드나 블루가 와서 부축을 했고, 하영은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감독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컷을 외치며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연조를 칭찬했다. 하영은 그 장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촬영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 핑크는 액션 신 없나요?
 감독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하영 씨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지금 찍고 있잖아. 하영은 평소 감독과 대화하던 것처럼 높은 톤의 애교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넘어져서 레드랑 블루가 부축해주는 것도 액션인가요. 하영의 말에 감독과 무술감독이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곧 감독이 짜증이라도 난 듯 목소리를 높여 답했다. 액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듣는 입장이 불쾌하지 않겠어, 안 그래? 그리고 지금 촬영 중이야, 하영 씨. 분위기는 싸늘했다. 연조는 엉거주춤하게 서 감독과 하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왜 하필 자신의 촬영 도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고, 괜히 하영이 원망스러웠다. 네, 죄송해요. 하영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조는 피곤이 묻어나는 하영의 얼굴을 훔쳐보다 눈이 마주쳤다. 가면에 난 검은 창으로는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 뒤로 연조의 신에서는 액션이 조금이나마 늘었다. 거대한 분홍색 칼을 휘두르거나 가끔 돌려차기를 하는 정도였지만 액션이라면 액션이었다. 그리고 하영이 촬영장에서 고립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감독이 연조의 신을 촬영할 때마다 한마디씩 하는 하영을 대놓고 귀찮아하자 스텝들도 이전보다 티가 나게 하영을 무시했다. 특히 회식 때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피곤해 보이는 하영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하영도 가만히 물만 마시다가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사람들은 하영이 문밖으로 나서면 그제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흐지부지 넘어갔다. 연조는 하영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스텝들 사이에 끼어 머리를 숙여 인사만 했다. 그런 와중에 연조는 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연조와 하영은 함께 걸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영은 말없이 걷는 게 익숙해 보였고, 연조는 하영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역이 가까워질 무렵 하영이 말했다.
 번호 알려주실 수 있나요.
 연조는 하영의 갑작스러운 말에 잠깐 머뭇거리다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사적으로 얘기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하영이었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을 할 핑계는 없었다. 게다가 하영이 사람들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기 시작한 게 자신의 액션 신 때문이라는 걸 알아서, 하영을 보면 연조는 미미한 고마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영은 연조의 번호를 저장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액션 장면 해보고 싶었어요.
 스턴트 배우는 필요 없다는 건가, 연조는 괜히 기분이 상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인기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영은 엄연히 주인공이었는데 굳이 연조의 역할까지 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연조는 잠깐의 침묵 후에 그랬나요, 그 정도의 미적지근한 말만 내놓았다. 말을 뱉고 너무 퉁명스러웠나 싶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 제가 도와줄 게 있다면 말해주세요. 하영은 키가 엇비슷한 연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중에 연락해요. 연조는 집에 가며 하영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한동안 하영에게서 연락이 올까 봐 불안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 뒤로 하영에게 연락이 온 적은 없었고, 연조도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연조는 어디로 가면 되는지 하영에게 물었다. 한강공원에서 만나요.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잇달아 도착한 하영의 문자를 보며 연조는 그때의 나중이 지금을 말하는 거였나. 내가 번호라도 바꿨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마지막 촬영을 끝낸 지 반년이 지난 지금, 함께 촬영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점점 하나씩 잊히는 지금에야 하영이 연락을 했다. 연조는 하영이 우리 드라마 후속편도 제작된대요, 혹시 스턴트 할 생각 있어요, 같은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하영과 얘기하고 싶은 게 없었다. 하영이 연조가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것 같아서, 문득 두려워졌다.
 저 도착했는데 어디에 있어요? 연조가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연조는 공원 앞에서 멍하니 하영을 기다렸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꽤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 데이트하러 온 연인도 보였다. 그렇지만 연조는 여기서 가장 특이한 조합은 자신과 하영일 거라 생각했다. 이미 모든 촬영이 끝난 전대물 드라마의 주연 배우와 스턴트 배우, 히어로와 사이드킥 정도의 관계 같았다. 연조는 해가 일찍 져서 금세 어두워진 공원을 둘러보았다. 가로등에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조는 새삼스럽게 한강공원을 둘러보았다. 물가에 야경이 비치고 있었고, 여름과 달리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연조는 한강공원에서 했던 마지막 촬영이 생생했다.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날이었다. 드라마는 감독이 기대한 것처럼 대박이 나지 않았다. 쪽박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았다. 감독도 스텝들도 더 이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지 못했다. 날이 더워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흘렀고, 습한 탓에 온몸에 땀이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촬영장에서 웃는 건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이 전부였다. 예정보다 삼 주 빨리 끝나게 된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평소와 같은 결말이었다. 여전히 우주에 사는 너무 많은 적이 지구를 노리고 있었고, 최종 악당은 우주의 수수께끼로 남은 채 끝날 판이었다. 어쩌면 후속편을 내심 기대하던 감독이 원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공원에서 하는 촬영은 산에서 하는 것보다 고역이었다. 미리 갈아입은 복장은 바람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몸매가 좋아 보이기 위해 맨몸에 랩을 감싼 뒤 입어야 했기에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았다. 랩 안으로 땀이 고이면서 땀띠는 허벅지부터 시작해 다른 곳으로 점점 퍼지고 있었다. 연조는 나무 밑에 주저앉아 촬영을 기다렸다. 그늘에 앉는다고 앉았지만 얼굴로는 햇볕이 그대로 쏟아졌다. 미니 선풍기나 부채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거로 시원해지지 않는다는 건 지금까지의 촬영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연조는 미간으로 흐르는 땀에 눈가를 찌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자전거 도로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연조가 앉아있는 곳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데, 강은 물결이 일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조는 중학교 이후로 어딘가에 뛰어든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막고 있었는데, 온몸이 익고 얼굴로 열이 모이니 참을 수 없었다. 연조는 한참을 강물만 바라보다 곧 촬영이라는 보조 스텝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조는 먼저 촬영을 끝낸 하영과 마주쳤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이후로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가면을 벗고 있던 연조의 얼굴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양산을 쓰고 있던 하영의 얼굴은 그늘이 져 있었다. 얼굴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연조는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그늘진 하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영은 연조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연조는 하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영도 이어 인사를 하고, 그렇게 지나쳤다.
그날 감독은 분풀이라도 하듯 연조의 액션 신을 비난했다. 더워서 붉어진 얼굴로 촬영 중인 신이 끝나기도 전에 컷을 연달아 외쳤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연조 씨 오늘따라 왜 이래, 평소에는 잘하다가. 왜 그렇게 기계적으로 뛰냐고, 자기가 육상대회를 나간 것도 아니고. 히어로의 마음으로 달려야지.
악당을 향해 뛰어가는 장면에서만 세 번째로 지적을 받자 연조는 당황스러웠다. 모두가 연조를 바라보고 있었고 평소에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감독의 신호에 맞춰 촬영이 시작되고 달려야 할 때가 되면 중학교 때 코치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연조 넌 키가 작으니까 다른 애들보다 더 잽싸야 해. 신호탄 터지자마자 죽어라 달려야 한다고. 무릎은 최대한 올리고 발목도 올리라고. 팔치기도 더 빠르고 세게 해. 죽을 것처럼 하라고. 연조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 나가듯이 달렸고, 다시 감독은 짜증스레 컷을 외쳤다. 컷, 정말 왜 그래! 연조는 헬멧처럼 앞뒤가 막힌 가면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쉬려고 할수록 막히는 것 같았다.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어지러웠다.
 
연조는 중학교 이학년까지 육상부를 했다. 육상부를 하다 보면 연습이랍시고 수업을 빠지는 일이 잦았다. 특히 대회 철이면 몇 반이었는지 연조 자신도 까먹을 정도였다. 연습이 없는 날에는 수업을 들어도 피곤해서 엎드려 잠을 잘 때가 많았다. 몸을 푼다고 운동장을 열 바퀴는 뛰고, 몇 시간을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뛰고 멈추기를 반복하다 보면 교실에 들어와서도 햇볕 아래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했다. 익어서 열이 오른 얼굴은 차가운 책상에 붙이면 그제야 좀 괜찮았다. 선풍기 바람이 스쳤다가 지나가기를 반복하는 그때만큼은 코치에게 기록이 안 나온다고 한소리를 들은 것도 잊을 수 있었다. 괜찮은 날들이었다.
잘 뛰는 애들은 여전히 잘 뛰었고, 좀 뛰는 편에 속하던 연조는 점점 더 뒤처졌다. 코치는 네 다리로는 안 된다며 키를 키우든지 더 빨리 뛰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고 했다. 연조는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육상부를 그만두었을 때, 연조의 반에 연조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이미 무리는 짝을 지어 나뉘어 있었고 아이들은 연조를 경계했다. 짝수 무리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시험 때마다 바닥을 깔아주던 연조가 치고 올라올지도 모르는 상황도 반기지 않았다. 육상부 때는 엎어져서 잠만 자더니 웬일로 일어나있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깨 있는 연조를 보고 말했다. 아이들이 일제히 연조를 쳐다봤다. 연조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운동장에서 햇빛을 직격으로 맞으며 달리는 것 같았다.
 
연조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면의 검은 창으로는 모든 게 잿빛으로 보였다. 아주 검거나 짙은 회색이나 연한 회색이거나. 문득 떠오른 건 하영이었다.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자, 감독 가까이에 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하영이 보였다. 한참 악다구니를 퍼붓던 감독은 지쳤는지 마지막 신인데 마무리 좀 잘하자는 말을 끝으로 사인을 보냈다. 연조는 마지막 촬영을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더워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하영의 얼굴에 지던 그늘만큼은 선명하게 생각났다. 차분하고 음울한 느낌. 검은 창으로 보는 바깥은 햇빛마저 이전만큼 쨍하지 않았다. 잿빛이 도는 흰색 빛은 음침한 기운이 더 강했다. 연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달궈진 공원 바닥에서 굴렀다.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 집중해야 했다. 변신한 동료들과 함께 정해진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연조의 촬영도 끝이 났다.
 
거기서 뭐 해요.
누군가 연조를 툭 쳤다. 멍하니 물에 비치는 야경을 바라보고 있던 연조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하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하영은 그때보다 더 말라 있었다. 여느 때처럼 피곤해 보였고 볼은 우묵하게 파여 있었다. 연조의 어깨에 짚은 손도 전보다 앙상했다. 하영은 야구모자를 쓰고 품이 큰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연조는 실제로 하영을 만나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손에 자꾸 땀이 차서 옷에 문질러야 했다. 연조를 바라보던 하영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밥 먹을래요?
하영은 뭐가 먹고 싶냐는 예의상 던지는 질문도 없이 연조를 김치찌개 집으로 데려갔다. 오랜만에 만나도 하영은 하영이라 생각하며 연조는 겉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연조는 앞에 있는 하영을 쳐다봤다. 하영은 양손을 무릎에 놓고 방금 막 나온 찌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연조에게 할 말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연조는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왜 한강공원에 있었어요? 하영은 찌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냥요. 연조의 하영의 대답을 듣고 나서 하영과 대화를 시도하던 스텝들이 민망한 표정으로 돌아섰던 걸 기억해냈다. 하영은 말을 덧붙였다. 여기가 제일 좋을 것 같았어요. 하영과의 대화는 항상 연조가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얘기를 꺼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영과 대화를 이어갈 이야깃거리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연조는 하는 수 없이 찌개가 끓기만을 기다렸다.
조용한 실내에서는 찌개가 천천히 끓는 소리만이 들렸다. 곧 김치찌개에서 침이 당기는 신 냄새가 올라오고, 떡 사리가 물렁물렁해졌다. 연조가 국자로 김치를 퍼 앞접시에 담으려 할 때였다. 하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수저 줄까요, 하고 묻는 것처럼 무심하고 딱히 아무 의미 없다는 말투였다.
사실 친해지고 싶었어요.
연조는 하영의 말에 국자를 내려놨다. 갑자기 입맛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요? 연조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연조 대신 국자를 든 하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조의 앞접시에 김치와 두부, 떡, 햄을 국물과 함께 퍼 덜었다. 연조 쪽으로 그릇을 내밀며 하영이 말했다. 여기 라면사리 넣어도 맛있는데, 라면사리도 추가할까요? 연조는 그릇을 받으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이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같은 역할이었지만 하영은 진짜 배우였고, 연조는 스턴트 배우였으니까. 게다가 하영은 연조의 액션 신도 맡고 싶어 했었다. 촬영장에서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게 전부인 사이였다. 연조는 하영에게 말을 붙이는 대신 두부를 먹었다. 칼칼한 국물이 밴 두부가 입안에서 뭉그러졌다.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맛있다, 입에서 절로 소리가 나왔다. 앞에서 자기 앞접시에 김치를 덜던 하영이 말을 덧붙였다.
맛있죠, 예전에 진짜 많이 다녔어요. 마지막 회식 날에도 혼자 여기 왔었어요. 갑자기 먹고 싶어서.
네? 연조는 떡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하영을 바라봤다. 하영은 더 이상 말할 기미 없이 찌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연조는 그날을 생각하자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았다. 물을 마셔도 단단히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무언가. 연조는 마지막 회식 때 하영이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촬영 마지막 날의 전체 회식은 방송국 근처의 저렴한 고깃집에서 이루어졌다. 기름기가 배여 끈적거리는 식탁 위에 수저를 올리고 그을린 자국이 있는 앞접시를 돌렸다. 사람들은 낮의 더위 탓에 지쳤으면서도 드라마가 종영하는 탓인지 어딘가 모르게 과열된 분위기였다. 연조는 스텝들과 앉아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렸다. 냉동 삼겹살은 불판 위에서 기름을 튀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고기 특유의 기름지고 침이 당기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테이블에선 대화가 이어지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종영에 대한 환호와 대박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정말로 아니었다는 실망감, 에어컨 덕에 시원한 실내에서 더 쉽게 늘어지는 더위 먹은 몸 등 대비되는 것들의 회식자리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흥분하다가도 쉽게 지쳤고, 지쳤다가도 쉽게 흥분했다.
감독은 건배사가 끝난 후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술잔을 돌렸다. 가장자리인 연조의 테이블까지 오려면 꽤 걸릴 것 같았다. 맞은편의 스텝들은 그들만의 대화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연조는 고기를 씹으며 언니가 퇴근하고 승연을 데리러 갔을까, 그나저나 이제 돈은 어떡하지, 연결되지 않는 생각들을 산발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턱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고기를 씹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연조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언니네 가족과 함께 지냈다. 연조는 어린 승연과 같은 방을 써야 했는데 다행히 승연은 연조와 같이 자는 것을 좋아했다. 언니와 형부는 연조에게 눈치를 주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항상 각자의 일로 바빴고 밤늦게 돌아와 인사를 하는 게 전부였다. 언니 부부가 주말이면 소파에 늘어져 있는 사이 연조가 하영을 데리고 놀러 다녔다. 언니는 연조가 있어서 편하다고 말하고는 했다. 형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연조는 스턴트 일보다 승연에게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그해 여름에 승연이 연조에게 비밀이라며 하는 얘기들은 연조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연조 씨, 이제 뭐 할 거예요?
연조는 갑작스러운 스텝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시 고기로 향하던 젓가락을 멈췄다. 맞은편의 스텝들이 연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조는 젓가락을 앞접시에 내려놓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굳이 생각나는 게 있다면 다음 주에는 승연과 놀이공원에 갈 것 같다는 게 전부였다. 연조는 어색하게 웃으며 글쎄요, 일단 쉬지 않을까요, 라고 답했고 스텝들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하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잠시 서로의 턱이나 어깨, 손 같은 곳을 멋쩍게 바라보다가 스텝들은 다시 그들만의 대화를 시작했고 연조는 젓가락을 들었다. 물기를 턴 상추에 고기 한 점을 올렸다. 앞으로 어떤 걸 하게 될지 연조도 잘 몰랐다. 입안에 기름기가 돌고 속이 더부룩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네. 테이블의 한 바퀴를 거의 다 돈 감독이 연조 맞은편 스텝의 어깨를 툭 치며 나타났다. 사람들에게 술을 한 잔씩 건네고 받아 마시기를 반복한 감독은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잔을 들었다. 이 멤버 리멤버, 같은 건배사를 외치며 잔을 부딪쳤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영을 대신해 촬영하는 게 전부였는데 누가 자신을 기억할까, 연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연조 스스로도 자신이 핑크였다는 걸 금방 잊을 것만 같았다.
연조 씨. 감독이 연조를 불렀다. 네? 연조가 쳐다보자 감독은 꼬인 혀로 진지하게 말했다. 고생했어요. 연조 씨도 촬영하면서 느꼈겠지만, 하영 씨가 워낙, 좀 남다르잖아요. 가장 피해를 본 게 연조 씨 아닐까 싶어. 연조는 아니었다고, 하영이 확실히 좀 특이하지만 피해를 준 건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같은 테이블의 스텝뿐만 아니라 옆 테이블까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느꼈다. 연조는 특히 여름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등부터 땀이 다시 나는 것 같았다. 목이 달아오른 연조는 그건 아닌데, 아니……, 네……, 하고 어물거리다 말았다. 감독은 얼굴이 빨개진 연조를 향해 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는 다른 테이블로 떠났다. 사람들도 언제 쳐다봤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연조는 순간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하영을 찾았을 때, 하영은 연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영은 주연 배우들과 함께 있었는데, 딱히 고기를 먹는 것도 아니었고 대화에 참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만히 연조를 바라볼 뿐이었다.
연조는 눈을 내리깔고 불판을 쳐다봤다. 어느새 검게 탄 불판 위에는 바짝 익은 고기 몇 점과 마늘이 올라가 있었다. 연조는 무언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도 스스로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건 오랜만이었다. 연조는 잠시 상황을 곱씹다가 빠르게 잊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모든 촬영은 끝이 났고, 감독도 하영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연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의 말을 잊었다. 저녁 일곱 시쯤 되어 언니에게서 연락이 온 탓이었다. 야근을 해야 하니 승연을 대신 데리러 가달라는 연락이었다. 연조는 짐을 챙기며 급하게 일어섰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술자리에서 연조 하나쯤 나가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해가 져도 여전히 후덥지근한 열기가 얼굴에 닿았다. 낮에 달궈진 땅이 식으려면 아직도 먼 듯했다.
집에 가요? 문 옆에는 하영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하영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고, 목소리에도 맥이 없었다. 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와 같은 하영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영은 촬영이 없을 때면 매번 지쳐 보였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배우나 스텝들은 촬영만 들어가면 딴판이라고 수군거렸지만, 연조는 하영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쥐어짠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이따금 그렇게까지 카메라 앞에 설 이유가 있을까, 의문이 들다가도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쫄쫄이를 입고 땡볕에서 대기하는 자신의 모습에 이내 수긍하고는 했다.
일이 있어서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연조는 고개를 숙여 하영에게 인사했다. 하영은 대답 없이 연조를 바라보았다. 그늘진 곳에 있는 탓인지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연조가 뒤돌아 가려고 하자, 하영은 문득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연조는 하영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는 하영이,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하영이 말을 덧붙였다. 할 말 없냐고요. 연조는 멍하니 보이지 않는 하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겨우 반문했다. 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연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골목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등 뒤로 하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연조는 역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달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숨을 몰아쉬었다. 중학교 때 맞아가면서 교정했던 자세는 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웅크렸다가 튀어 나가는 모습, 뛸 때 종아리의 형태와 걸음의 보폭은 몸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연조는 종일반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승연을 데리러 갔다. 신발장 앞에 앉아있던 승연은 숨을 몰아쉬는 연조를 보자마자 무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
이럴 줄 알았어.
승연은 딱히 엄마를 찾는 아이가 아니었다. 얼굴에서도 섭섭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승연은 다만 능숙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엄마가 바쁜가 봐, 항상 그렇지만, 연조는 승연에게 언니가 데리러 오지 못한 이유를 댔다. 나도 알아. 승연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승연은 금세 재잘거리며 연조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놀이터에서 지옥탈출 했어. 나는 다른 애들 없어도 탈출 잘해. 연조는 승연의 눈치를 살피며 언니의 집으로 향했다. 연조는 방의 불을 끈 뒤 승연의 옆에 누웠다. 승연의 방 천장에는 야광이 거의 다 빠진 별 모양 스티커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조는 그날 밤 내내 뒤척였다. 하영의 마지막 말을 잊으려 했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것들은 뒤로 넘겼는데, 하영의 말은 넘어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무언가 어둠을 비집고 다가왔다. 눈 위에 손을 얹고서야 겨우 잠들었다.
 
연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영을 바라봤다. 자신을 떠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알았다. 하영은 연조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밥을 먹었다. 연조는 하영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자꾸 뒷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았다. 연조는 애써 무시하며 가게를 둘러봤다. 연예인들의 사인이 붙어있는 벽에 시선이 갔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이었다. 열 개는 돼 보이는 사인지 중에 하영의 것도 있었다. 굵은 매직으로 하영이라 쓰여 있었다. 오 년 전에 쓴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하영은 그때도 조용히 드라마를 찍었다. 어린이 전대물보다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던 드라마. 갓 스물이자 배우로서 십일 년 차를 맞은 하영은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연조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뭐 하고 있었지, 연조는 모서리가 둥근 글씨를 바라보며 멍하니 밥을 먹었다. 칼칼한 국물을 마시고, 밥을 푸고, 김치나 햄 같은 건더기를 건져 먹고, 마지막으로 넣은 라면까지 입으로 불어서 식혀가며 먹었다. 먹다 보니 어느새 가게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연조는 어쩐지 조용하게만 느껴졌다. 하영은 밥을 먹을 때에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릇에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을 마시며 연조는 밥 먹는 것조차 하영답다고 생각했다.
하영 씨, 연조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영이 고개를 들어 연조를 바라봤다. 갈색 기 없는 검은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빛이 돌았다. 왜요, 할 말 있어요? 하영이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 회식 날이 떠올랐다. 연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요.
식당에서 나오니 해가 져 있었다. 차도를 건너면 역까지 빨리 갈 수 있었지만, 연조와 하영은 한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강가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비린내가 올라왔다. 검은 물에는 맞은편의 야경이 비치고 있었다. 땅을 보며 걷던 하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부러웠어요. 전 맡아본 적 없는 것들이라. 저는 매번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잖아요.
연조는 당황스러웠다. 강을 바라보던 연조는 고개를 돌려 하영을 바라봤다. 하영의 얼굴을 바라보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오늘 내내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듣고 있었다. 친해지고 싶었다는 것도, 부러웠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조는 이름 없는 스턴트 배우에 불과했고, 그때 촬영했던 액션들은 액션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다. 그 촬영이 끝난 후 곧장 다른 드라마를 시작한 하영과 다르게 연조는 아무 일정도 없이 언니 집에서 반년을 그냥 보냈다. 게다가 연조는 한 번도 하영에게 호의적으로 군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건 말 그대로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거다. 속이 울렁거렸다. 바닥을 보던 하영이 어느새 연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바라는 눈치였다. 연조는 저도 모르게 작게 물었다. 마지막 날, 했던 얘기 기억해요? 하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얘기인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기억이 났는지 아, 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신경 썼다면 미안해요. 근데 그때로 돌아가면, ……그래도 똑같이 말할 것 같아요.
연조는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오늘 하영을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후속작이 나올 리 없는 드라마의 소식을 정말로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다른 말을, 하영이 뭐라도 따져주기를 바랐나. 그때 왜 그랬냐고.
저 불편해한 것 알아요. 그래도 도와준다고 한 사람은 처음이라서. 그냥 기대를, 아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영은 잠깐 입을 닫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다음에 같이 운동이나 하면 좋겠네요, 내일 일정을 얘기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영의 문자를 받은 뒤부터 알 수 없는 불안이 스타트라인에 손을 짚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라인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무게를 싣고 있었데, 이제야 신호탄이 터진 것 같았다. 연조는 하영의 말을 들을수록 참을 수 없었다. 뒤로 넘겼던 말들이 자꾸만 넘쳤다. 넘쳐서 연조를 덮쳤다.
아뇨, 아니에요. 저는 그냥, 소리를 지르듯이 말을 꺼낸 연조는 점차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듯이 작아졌다.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로 입만 달싹였다. 하영은 그런 연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주 보던 시선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액션 신을 찍는 연조를 바라보던 때, 그때의 얼굴이었다. 연조는 하영의 얼굴을 마주한 채 조금 맥이 빠져서 속에 있던 것을 털어놓았다.
……지금도 달리기만 하면, 물에 뛰어들고 싶어요.
말을 하고 나서 연조는 이게 하영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묻어왔던 말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누구에게 하려고 했던 얘기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편이던 하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연조와 눈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조는 순간 하영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강을 쳐다봤다. 하영도 연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늦은 저녁의 강은 검고 깊었다. 그 표면에 건너편 건물의 불빛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하영은 연조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연조는 하영이 자신의 마지막 말을 어떻게 기억할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상의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둘은 아무 얘기 없이 한강을 따라 걸었고, 걷다 보니 역이었다. 연조는 머뭇거리다 오늘 즐거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연조의 인사에 하영은 손을 흔들며 다음에 보자고 말했다. 사실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다시 하영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전철을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다음엔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조는 창밖으로 보이는 컴컴한 한강과 도로를 메운 차들의 불빛을 바라봤다. 시선이 자꾸 흐려졌다.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결국은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머리부터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연조는 창에 비치는 자신이 언니와 겹쳐 보였고, 하영을 만나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언젠가 뒤로 제쳤던 것들이 연조를 따라잡고, 연조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오늘 하영을 만난 게 후회됐다.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연조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전철에서 사람들에게 치여서 온 탓일지도 몰랐다. 연조는 보도블록을 바라보며 억지로 힘을 줘 걸었다. 아파트 단지까지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한참을 걷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이 연조를 앞질렀다. 연조는 여전히 뒤처질 때마다 불안감을 느꼈다. 중학교 때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맴도는 것 같았고, 눈앞에 백 미터 트랙이 어른거렸다. 반사적으로 종아리에 힘이 들어갔다. 연조는 의식적으로 더 느리게 걸으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지나가자 주변이 적막했다. 마치 진공상태처럼,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우주에 있는 악당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서 지구로 왔나. 연조는 한때 히어로였다는 걸 자꾸 잊었다.
현관문을 열자 소파에 늘어진 언니가 보였다. 왔니, 시선을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였다. 불 꺼진 거실에는 텔레비전의 푸른빛만이 언니의 얼굴로 쏟아졌다. 형부는, 연조가 묻자 언니는 짧게 대답했다. 회식. 언니는 피곤한 낯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평일 저녁에 하는 시트콤으로, 두 가족이 결혼 때문에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조가 알기로 저 시트콤에 하영이 나왔다. 철부지 막내딸 역할로, 하영에게 늘 주어지는 것들과 비슷했다. 당찬 성격에 거침없이 말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화가 나면 눈치를 보고 애교를 피우는 역할. 최근에 사돈집 남동생과 러브라인이 그려지며 주요커플은 아니지만 인기가 있었다. 연조는 고개를 돌렸다. 승연이는, 연조가 신발을 벗으며 묻자 언니는 텔레비전의 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자고 있어. 그보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니.
연조는 외투를 벗으며 무슨 말, 하고 되물었다. 언니는 여전히 연조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승연이 따돌림 당하는 거, 정말 몰랐어? 연조는 아무 대답 없이 외투에 섬유 탈취제를 뿌리고 옷걸이에 걸었다. 드라마의 배우들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주인공들이 오해하고 다투고 화해했다. 서로를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언니는 한 번 더 물었다. 연조 너, 그때 일 복수하는 거니? 침착한 목소리였다. 연조는 가족사진을 바라봤다. 가운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승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연조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조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연조 스스로 따돌림 당하고 있다는 걸 인식했을 때는 이미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밥을 혼자 먹거나 혼자 음악실에 가거나 할 때, 연조는 반에서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거 나도 들은 건데 걔가 육상부에서, 로 시작하는 얘기가 돌 때만 연조가 언급됐다. 어느 주말에 연조가 언니에게 나 자퇴하고 검정고시 볼까, 라고 물었을 때 언니는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연조가 장난이라고 덧붙이자 언니가 입을 열었다.
연조야, 미안한데 조금만 참으면 안 될까.
아침에 하천을 따라 학교로 갈 때면, 연조는 저도 모르게 하천으로 달려가는 상상을 했다. 단거리 달리기를 할 때처럼 다리의 근육을 팽팽하게 모았다가 풀면서,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죽고 살고를 떠나 그냥 뛰어들고 싶었다. 연조는 언니를 이해했다. 언니도 연조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랐고, 연조 역시 자신이 뭘 바라는지, 도움이 필요하긴 한 건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언니는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었고 자신보다 더 큰 문제들을 앞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조는 자신이 언니를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지금까지 믿어왔다.
 
그쪽은 매번 어떻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딱 나타나요?
텔레비전에서는 하영이 나오고 있었다. 연조는 화면을 바라봤다. 웨이브 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프릴이 달린 니트를 입은 하영이 보였다. 상대 배우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조는 자신이 아는 하영을 떠올렸다. 하영에게 주어지는 것들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조는 승연의 방에 들어갔다. 무드 등이 켜져 있어서 자고 있는 승연이 보였다. 승연은 더위를 많이 타서 매번 이불을 발로 차는 바람에 제대로 덮고 자는 적이 없었다. 연조는 이불을 다시 덮어준 뒤 승연의 이마를 쓸었다. 자면서 땀을 흘렸는지 이마가 끈적거렸다. 연조는 승연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가만히 승연을 바라봤다. 승연이 반에 괜찮은 애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걸 연조는 기억했다. 승연은 혼자인 게 더 편하다고 했다. 승연에게는 당연한 지옥 탈출을, 연조는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작게 코를 고는 승연을 바라보다 연조는 무드 등을 껐다.
연조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가장자리가 떨어지려 하는 야광 별들을 바라보니 전에 찍은 전대물 드라마가 생각났다. 매번 에피소드를 시작할 때마다 어두운 우주를 보여줬다. 검고 칙칙한 행성에서 외계인들이 지구를 바라보는 것으로 사건이 시작됐다. 그리고 외계인들은 항상 지구정복에 실패하고 자신이 살던 행성으로 돌아갔다. 연조는 지금껏 자신이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지구를 구했다고 믿어왔다. 그렇지만 연조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구했는지, 구하기는 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연조는 자신이 누구의 히어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조차 구해본 적이 없었다.
 
 

소설 부문 당선 소감

 

다른 사람의 설렘을 원동력으로
 제가 쓴 글이 제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과 마음에 드는 일은 설레면서도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앞으로 글을 쓰는 데 있어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혼자서 쓰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데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쓰면서도 즐거웠고, 많이 아끼고 좋아하던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로 다른 분들이 읽게 된다니 떨립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남을 수 있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김유미 선생님과 배은별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셨던 얘기들로 여전히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매 학기 많은 가르침 주시는 이장욱 교수님과 모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생각이 한층 깊어지는 데 도와주신 모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고맙습니다. 언제나 큰 원동력입니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데에 있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딸, 동생을 매번 지원해주는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언제나 사랑합니다. 그리고 제 글에서 가능성을 찾아주신 심사위원분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써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껏 써왔고, 앞으로도 쓸 것 같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사유의 깊이와 세계의 다양화
 올해 김용문학상에 투고된 작품들은 모두 완성도가 뛰어났다. 사유의 밀도도 높아서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런 만큼 예심의 과정이 매우 오래 걸렸고, 꽤 어려웠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각 작품이 포착하고 있는 세계의 단면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소재의 다양성이나 장르 문법의 다양성 차원을 넘어섰다.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지만, 소설의 공간이나 인물의 욕망을 달리 포착하면서 일상에 매몰된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줬다. 그만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된 작품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SF나 무협소설로 발전시켜도 좋을 작품들, 해외입양아나 동성애 남동생과 형의 미묘한 관계 혹은 죽음준비 교육 등의 문제를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들, 제주나 경상과 같은 지역의 역사와 생활을 살려낸 작품들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소설들이 인물들의 무덤덤한 표정들을 포착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등의 순간에 드러난 이러한 인물들의 무표정한 반응은 현재 소설이 주의 깊게 응시하고 사유해야 되는 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모든 작품이 좋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심은 「안개에 젖은 여름은 차갑기도 하다」와 「웰다잉, 이븐」, 「스턴트 히어로」, 「서술자 오, 용삼 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웰다잉, 이븐」은 죽음 공부라는 주제로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의 고통과 상처를 희극적이고 경쾌하게 풀어나갔다. 아이의 상처에 비극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아이를 잘 지켜봐 주는 거리감, 상처의 극복을 위해 쉽게 교훈을 던지지 않는 조심스러움이 매우 돋보였다. 다만 인물 간 관계가 조금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안개에 젖은 여름은 차갑기도 하다」는 시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탄탄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를 바탕으로 신비로운 동화와 같은 분위기를 잘 구축하였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암시되는 성폭력 사건이 전형적 설정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고민한 작품은 「서술자 오, 용삼 씨」와 「스턴트 히어로」 두 작품이었다. 「서술자 오, 용삼 씨」는 다큐멘터리 제작PD가 베트남에서 우연히 만난 오용삼 씨를 통해 직장 내 성폭력과 젠더 간 성인식 차이를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젠더 감수성이 둔한 편으로 설정되는 남편을 서술자로 삼아 그의 인식 변화 과정을 다루는 방식이 독창적이었다. 「스턴트 히어로」는 스턴트맨 연조를 중심으로 주연배우 하영과의 미묘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화려한 주연배우와 그림자 스턴트맨은 대조적인 삶처럼 보이지만, 둘 모두 타인의 요구에 맞추어 히어로를 연기하면서, "그럼 제가 하는 건 뭔가요?"라는 의문을 가진 채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사람 모두 상식적 집단의 세계에서 배제되어 상처받은 인물이지만, 이 작품은 손쉬운 공감이나 타협을 시도하지 않는다. 연조와 하영은 서로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그 시도는 재빨리 어색한 침묵으로 덮인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 불편함 때문이다. 표면에 제기된 갈등을 쉽게 봉합하지 않고 어색하고 불편한 현실을 끝까지 직시하는 그 시선이 좋았다. 앞으로의 작품 활동 속에서도 이러한 불편함을 예민하게 포착해 나갔으면 한다.

심사위원: 이주라(문화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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