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고무줄이 헐렁하게 늘어나고 누렇게 물이 빠진 면팬티는 말하자면, 나의 마지막 보루다. (…중략…) 그 애의 손가락은 점점 내 팬티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팬티! 삼 년 동안 줄기차게 입어온, 양은솥에 넣고 푹푹 삶아댄,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낡은 팬티!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

 사랑은 낭만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낭만적이지 않다. 프롬은 낭만적 사랑과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지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 낭만적이고 순수한 우리 현대인들이 목숨을 내건 로맨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롬은 자본주의가 낭만주의시대의 사랑을 계승한 현대인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산과 소비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 역시 소비의 대상이며 생산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랑? 그렇다. 낭만주의 시대의 그 폭풍같은 사랑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폭풍같이 소비하며 폭풍같이 사랑한다. 폭풍같이 소비하여 사랑을 쟁취하거나, 폭풍같이 사랑을 쟁취하여 폭풍같이 소비한다.

 정이현의 소설은 자본주의사회의 여성들을 그리고 있다. 낭만주의적 사랑의 이미지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여자들, 어쩐지 팬티를 쉽게 벗는 여자들은 가치가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법칙으로 보자면 이미 이용가치가 없어져버린 중고품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여자를 거느린 남자와 수많은 남자를 거느린 여자, 이 둘에 대한 평가는 판이하다.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는 사랑의 소비자이고 여자는 사랑의 생산자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여성의 순결은 남자들이 노력을 통해 얻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라 여자는 순결을 지키고, 남자는 일정한 대가를 치루며 그것을 소비한다. 그러나 정이현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발칙하다. 자본주의의 상도덕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소설속의 이 발칙한 여자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상품임을(설령 자신들이 중고품일지라도!) 과시한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소비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해 그녀들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여자들은 눈물겹게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순결을 지켜 나가고 어떤 여자들은 콧방귀를 뀌며 자본주의와 남자들을 짓밟아 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칙한 여자들 앞에서 남자들의 태도는 한결같다. 남자들은 여전히 소비하려 한다. 그것도 매우 맹목적으로! 기이한 일이다.

서덕민 (시인,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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