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사실과 픽션 사이의 경계지대’
저널리즘, 사실기록을 금과옥조로 추앙
헤밍웨이, 저널리스트로 문학적 성취 이뤄

논픽션, 객관적 기술 단순보고서 ‘경계’
문학, 삶의 진정성 도출하는 창작활동
상대적 자유 벗어나 궁극적 자유 구가해야

 사실의 기록+문학=저널리즘+문학=저널리즘 문학은 다소 생소한 표현이다. 저널리즘을 말하는 데 문득 문학이 왜 끼어드는 것인지 낯설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필은 유독 ‘사실의 기록’을 강요당했다. 사실에 천착하는 글 쓰기는 논픽션이나 뉴스 기사 그리고 르뽀의 중심과제이다. 이런 장르는 현장(사실) 경험을 매우 중시한다. 경험은 그만큼 문학적 자양을 풍성하게 가꾸는 토양이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음풍농월에 젖는 문학은 한가한 지식인의 문자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저널리즘은 현장의 사실 기록을 매우 중시한다. 문학 장르 가운데 이런 저널리즘과 사돈을 맺어도 좋은 경우가 수필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어 상상의 빈곤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수필을 옥죄이는 족쇄일 것이다. 물론 사실의 근거 없는 사실을 가공하는 태도는 허위의식의 발로이다. 결코 수필작가의 좋은 태도는 아니다.
 사실에 근거하되 사실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는 문학은 어떤 것인가? 사실 기록이 본령인 논픽션이나 르뽀타쥐와 수필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어떤 논자는 이런 것을 르뽀 수필, 논픽션 수필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논의는 뒷날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수필은 ‘사실과 픽션 사이의 경계지대’를 그리는 문학이어서 현장성이 강조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현장 경험이 풍부한 경우가 좋은 작품 생산의 조건이지만 ‘오직’ 그  사실의 기록‘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저널리스트의 글 쓰기는 사실에 철저하다. 그런데 그런 글 쓰기가 곧 문학은 아니다. 문학으로 대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저널리스트는 사실을 능동적으로 취재하는 것이 본업이다. 사실의 기록은 저널리스트의 기본 태도이다. 저널리즘은 사실의 기록을 금과옥조처럼 추앙한다. 그런 사실의 건조한 나열이 문학일 수 없다는 뜻과 통한다.
 이와 비슷한 글 쓰기 가운데 사실의 기록을 중시하는 장르는 논픽션이다. 논픽션은 ‘진실 파지를 저널리즘에게 위임하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나 그런 저널리즘이 문학적 집필(literary writing)이었을 때, 다시 말하면 문학적 기교(literary skill)가 사실 기술의 토대이었을 때 문학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이런 집필 스타일이 다름 아닌 문학저널리즘, 사실의 예술(the art of fact), 리얼리티의 문학(literature of reality)으로 부르는 문학의 한 부류이다.

 잡지나 신문의 글 쓰기는 대부분 저널리스트적인 낱말의 특징, 이를테면, 1物 1語를 강조한다. 정확한 서술을 특징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현장 경험이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문필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경우는 헤밍웨이가 좋은 예이다. 그의 <살인자>(The Killer)는 치밀한 장면 묘사와 간단한 문장 구사로 정평을 얻는 작품이다. 저널리즘 현장에서 단련된 문장력이 문학적 성취로 치환된 경우이다.

 수필이 논픽션인 점은 분명하지만 사실의 기록만 강조하면 논픽션과 다를 것이 없다. 사실을 기록하는 문학으로써 수필이 단순히 사실만 강조하다보면 결과적으로 사건의 발생 시점을 중시하여 저널리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사건의 발생 시점이 최근일 때 뉴스가치가 높듯 수필이 사실의 기록에 매달리면 수필 문학은 늘 시의성(timely)에 얽매어 저널리즘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뜻이다.
 픽션을 배제하는 것이 논픽션이다. 사실에 토대 하여 사건이 구성되고 사건끼리 조합되어 줄거리를 형성하고 그 줄거리를 문자화하는 것이 저널리즘적 글 쓰기이다. 그런 글 쓰기가 문학으로 대접받으려면 심미적 글 쓰기이어야 한다. 사실의 집합인 사건 체험에 매몰되어 그 현장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객관적 기록은 저널리즘이다. 그런 기사 쓰기의 결과물을 문학창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문학성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은 삶의 진정성을 도출하는  창작 활동이다. 진정성이란 절박한 삶의 자세 속에서 미감(美感)을 포착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렇게 포착한 삶의 미감을 문자로 표현하는 창조 활동이 다름 아닌 문학이다. 삶의 진정성이란 곧 진실성으로 통하는 길이며 그 진실은 사실에 앞선다.
 사실 속에 진실이 깃드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의 나열이 곧 진실 파지인 것은 아니다. ‘어제 밤 불이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글은 사실에 충실한 글 쓰기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옮겨 독자들은 “아,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런데 발화의 원인이 ‘생활고를 비관한 실직 가장이 일가족 동반 자살에 있었다’는 사실을 빠트렸을 때 이 글은 매우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 즉 객관적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의 나열이 곧 진실을 들추지 못하는 좋은 방증이다.
 문학은 사실적 삶 속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창조 행위이지만 있는 그대로 옮기는 글 쓰기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다식판에 찍은 찐빵처럼 삶을 규격화, 표준화하고 만다.
사실의 기록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어떠한 글 쓰기도 그 결과는 늘 작가의 주관성과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말하자면 객관적 글 쓰기를 고집하려 든다. 논픽션은 사실에 충실하는 글 쓰기이지만 자칫 객관적 서술에 그쳐 결과적으로 사건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단순 기록 또는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

 수필 역시 이런 고정화한 객관적 글 쓰기, 즉 사실의 기록에 충실하는 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수필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글 쓰기를 문학적 자유(literary freedom)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수필을 창작한다는 문학행위는 곧 삶의 진정성을 추적하는 미적 체험의 형상화 작업과정이다. 그럼으로 이미 고정화된 ‘사실의 기록’으로부터 ‘진실의 기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수필이 파격(破格)을 중시하는 것은 장르의 관습 또는 굴레에서 벗어나 사유의 무한한 확장을 구가하는 문학이라는 뜻이다. 수필의 상대적 자유론으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궁극적 자유(ultimate freedom)를 구가하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유분방한 사유 확장을 통해 거침없이 드러난 삶의 진정성을 자유롭게 형상화하는 문학, 그리하여 독자의 미적 감동에 크게 기여하는 문학, 그것이 사실의 기록에 매이지 않을 때 실현 가능한 것이라면 그런 구곽은 벗어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수필은 컴퓨터의 지원을 받는 화려한 집필(techicolor)이며 현대인의 쿼터리즘(quarterism)적 독서경향에 부합하는 장르일 것이다.

박 영 학 (정치행정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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